"패션도 무용도 새 도전에서 출발…끝까지 창작하는 사람으로 남고파"
9월 선보일 ‘그리멘토’ 무용 최초 학교폭력 주제로
무용 다음엔 영상작업 도전 " 드라마 대본 작업 중"
“무용에 처음 도전하게 된 계기요? 전통을 가장 현대적인 모습으로 보여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옛 정신을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대로 답습하는 데서 끝나면 의미가 없죠.”
오는 20일 미국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오르는 전통무용 ‘일무’를 연출한 패션디자이너 정구호(58)는 낯선 무용계에 도전장을 내민 지 10년 만에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첫 연출을 맡은 '단'(2013)을 시작으로 '묵향'(2013), '향연'(2015), '산조'(2021), '일무'(2022) 등 그의 손을 거친 전통무용 작품들은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해 처음 무대에 오른 ‘일무’는 종묘제례악에서 의식에 쓰이는 전통 무용으로 수십 명의 무용수가 열을 지어 같은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정 연출은 “일무를 처음 봤을 때 이만큼 모던한 전통춤은 없다고 생각했다”며 “정제된 움직임, 심플하지만 그 속엔 균형과 절제를 위한 호흡이 필요했고 그만큼 엄격한 형식에 따라 추는 춤이기에 그 이면에 새로운 창작을 할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형식과 규칙, 전통과 규정이 오히려 새로운 창작의 배경이 됐다는 그는 “처음 한국무용 작업을 시작할 땐 전통과 모던이 반반씩 만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또 지나치게 모던하면 관객이 어렵게 느낄 수 있어 점진적으로 그 작업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그가 ‘일무’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전통은 1막 일무, 2막 춘앵전과 가인전목단을 거쳐 3막에서 신일무로 구현됐다. 이 작업에는 현대무용 안무가 김성훈(영국 아크람 칸 무용단 단원)과 김재덕(싱가포르 T.H.E 댄스 컴퍼니 해외상임안무자)이 참여해 안무를 맡았다.
디자이너였던 그가 무용 연출을 맡으면서 통상 안무가가 연출을 맡던 관행이 깨졌다. 그는 공연의 시나리오와 무대디자인, 음악과 조명을 연출하고 안무는 안무가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무용을 안무로만 보면 1차원적인데 그 동작 너머 무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가면서 전체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는 정 연출은 “안무와 전체 공간이 하나로 잘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최고의 이미지가 나온다”고 강조했다.
‘일무’의 경우 전통방식을 따르면 정사각형 무대에서 진행돼야 하지만, 그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직사각형 무대가 오히려 더 한국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한다. “(대극장의 규모가 부담스럽지 않냐고 했었는데) 오히려 직사각형 무대에서 자로 잰 듯 어긋남 없이 정확하게 열을 맞춰 추는 안무를 더 한국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며 “큰 무대에선 더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던 만큼 뉴욕에서도 어떤 무대를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그가 선보인 한국무용은 국내에서도 젊은 관객을 공연장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 폭의 수묵화” 같다는 호평을 받아왔다. 그는 “대신 늘 안무가를 비롯한 스태프의 의견을 경청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작품의 메시지와 철학을 완성해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통무용에 집중된 그의 작업은 올해 새로운 장르로 이어질 예정이다. 오는 9월 세종문화회관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넥스트 무대에 오르는 현대무용 ‘그리멘토’는 무용 작품으로는 최초로 학교폭력을 주제로 다룬다. 정 연출은 “학교폭력에 대한 뉴스와 이를 다룬 OTT 작품들을 보면서 무용을 통해 직접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며 “미디어를 통한 계몽적 메시지가 다소 식상하게 다가갈 수도 있지만, 나는 학교 폭력만큼은 문제가 해결되고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수백 번 강조하고 표현해도 부족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교실을 무대로 한 이야기고, 학생이 주인공인 만큼 소품도 등장하기 때문에 안무작업에 더 집중하는 한편 춤의 움직임에 맞춘 영상작업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일무'에 이어 김성훈 안무가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
30대에 자신의 패션브랜드로 큰 성공을 거두고 이후 리움·호암 미술관 리뉴얼 총괄, 공예트렌드페어 총감독 등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그는 무용에 이어 최근 드라마 대본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하루 다섯 시간, 20쪽 분량의 글을 쓰고 있는데 글보다는 이미지를 통한 연상 작업이 익숙해서인지 일단 쓰는 데 집중하고 있고 써놓은 시놉시스는 다섯 편 정도 된다”는 그는 “패션도, 무용도 모두 새로운 도전에서 출발했고, 그 창작의 열망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영상도 그렇지만 그 결과를 넘어서 나는 죽을 때까지 창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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