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엔니오 모리코네는 '혁명적 작곡가'다
'영화음악은 반예술적 행동' 무시에도 새 바람 일으켜
"예술적 영감 존재하지 않아…땀 흘리는 작업 더해질 뿐"
절대 권력 쥔 영화감독 구속 극복을 과제로 삼아
설득하며 새로운 음향 추구 "작곡가로 기억되고 싶어"
조성 음악은 일곱 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청취자 감각에서 이해의 기준을 보장했다. 음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만큼 쉽게 받아들여졌다. 일관된 흐름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발표하면서 바뀌었다. 작곡가들이 반음계주의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는 열두 음을 사용하는 방법을 이론화했다. 음 하나하나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했다. 몇몇 음들만이 가진 특수성을 무시하는 건 일종의 민주주의 실현이었다. 흥미롭게도 그 시기는 여러 민주주의 나라들의 탄생과 엇비슷하다.
반복이란 기준에서 탈피한 음악은 즉각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음의 높이와 길이, 음색 등이 강조돼 한층 풍성해졌다. 나중에는 쉼표의 중요성까지 인정됐다. 급진적 변화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표현 양식의 변화가 적잖게 있었다. 대부분 민주주의의 도래처럼 역사·정치적 변동과 맞물려서 일어났다. 이른바 새로움을 추구한 혁명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바그너나 쇤베르크 못지않은 혁명가를 추앙한다. 바로 영화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엔니오 모리코네(1928~2020)다. 그가 투신하기 전까지 영화음악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평론가들부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탁론을 내지 못했다. 그만큼 음악의 순수성을 중시했다. 모리코네의 경우 스승인 고프레도 페트라시(1904~2003)조차 작곡가의 영화음악 참여를 반대했다. "전적으로 반예술적인 행동"이라며 깎아내렸다.
모리코네는 한동안 고립돼 내적 갈등에 휩싸였으나 영화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음악 작품이 장르와 가치를 떠나서 작곡자와 그 곡이 쓰인 사회의 거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낸 건 아니었다. 그는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의 저자이자 뉴욕대 영화과 교수인 안토니오 몬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영화음악 작곡가로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제일 힘들었어요. 물론 좋아서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를 위한 음악가가 진정으로 제가 원하던 일은 아니었거든요. 저는 피에르 불레즈(1925~2016)나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1928~2007), 루차노 베리오(1925~2003)의 뒤를 이어서 곡을 쓸 생각을 했었어요. 일찍부터 제가 아내에게 하던 말이 있어요. '음악사 속에 작지만 나만의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싶어.' 그것을 영화 음악사 속에서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쓴 순수음악 작품들이 서서히 연주되기 시작하는 걸 볼 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물론 그것이 영화가 제게 가져다준 명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감격스러운 연주를 들을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주옥같은 작품을 쏟아낸 비결은 무엇일까. 모리코네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이 바로 곡이 되진 않아요. 그게 문제죠. 작곡을 시작할 때면 늘 그 점 때문에 괴로워요. 눈앞의 빈 종이 위에 작곡가는 어떤 곡을 써야 할까? 그 빈 종이 위에 무엇을 적을까? 생각은 이미 있지만, 더 다듬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해요. 찾아내야 해요. 뭔 찾느냐고요? 그건 알 수 없죠."
모리코네는 예술적 영감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작업을 통해 음악으로 구체화할 초기 아이디어만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아이디어 자체에 뭔가가 있을 때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며. 실제로 작업 도중 아이디어를 완전히 뒤집거나 생략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영감의 기원을 감동의 차원에서 얘기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마치 아름다운 여성의 몸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듯이 얘기하죠.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작 단계에서의 아이디어에 불과해요. 사실은 첫 번째 아이디어가 두 번째와 세 번째 아이디어를 낳게 되는 거죠. 여기에 땀 흘리면서 하는 작업이 더해지고요."
일련의 노동은 실험이라 봐도 무방하다. 매번 현대음악과 영화를 오가며 창의력을 제고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의 가능성을 타진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션(1986)'에서는 음악이 없는 가편집본을 먼저 확인하고 맞춤형 음악을 만들었다. 모리코네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8세기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셒이 남긴 '파라과이에서의 성스러운 경험'이란 글 모음을 정독하고, 그 시대의 음악에 대해 수없이 고민했다.
그는 갖가지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없었다. 크게 세 가지 제약이 있었다. 첫 번째는 주인공이 오보에를 연주한다는 점이었다.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가 1750년 뒤의 음악을 표현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당시 종교음악 작곡가들이 전부 트렌토 종교회의에서 협약된 내용을 준수했다는 사실이다.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1525 추정~1594)가 만들어 놓은 규칙이었다. 그래서 모리코네는 모테트(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종교음악으로 주로 사용된 성악곡)를 사용했다. 세 번째는 파라과이 인디언 세계에 대한 고찰이다. 가지고 있던 자료만으로는 뭔가를 특별히 추출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골똘히 궁리한 끝에 지루하고 집요하게 반복되는 리듬을 생각했다.
모리코네는 이런 요소들을 두 가지 이상씩 짝지어서 표현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가 함께 드러나도록 곡을 쓴 것이다. 특히 피날레에서는 세 가지 요소를 한데 모아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아마도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더욱 강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미션'이란 영화가 그런 장르의 영화니까요. 세 가지 주제가 마지막 장면에 가서 모두 합쳐집니다."
모든 영화음악 작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영화에서 절대적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은 결국 감독이다. 모리코네는 이들의 구속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겼다. 단순히 제목만 가져다 붙인다고 찬송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매번 한계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쳤다. 감독들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때로는 몰래 다른 시도를 강행하며 '새로운 음향'을 추구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백과사전에 어떤 인물로 기록되길 원하느냐는 물음에 간결하게 답했다. "작곡가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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