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넘버 90%]②'정치 극한대립이 뭐죠?'…덴마크에서 목격한 '직접민주주의'[르포]
2800여개 행사 속에서 정치·사회 이슈 토론
지역구 의원 "시민에게 영감 받는 축제의 장"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남동쪽으로 180㎞ 떨어진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보른홀름. 이 섬의 북쪽 해안가에 있는 인구 1400명의 작은 마을 알링게(Allinge)에 이른 아침부터 수백개의 텐트가 펼쳐졌다. 덴마크 집권당을 포함해 각 정당과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이 마련한 텐트는 인파로 붐볐다. 덴마크의 최대 정치 이벤트 '폴케뫼데'에선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정치적 견해를 주고받았다. 덴마크의 진보정당 적록동맹 당원인 비르기트 해밍(Birgit Hamming·45)은 "지난 선거에서 득표가 저조해 당원을 모집하기 위해 참석했다"면서 "모든 사람이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폴케뫼데는 시민과 정책 결정자 간 거리를 좁히고, 신뢰를 높여 민주주의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2011년부터 시작된 덴마크의 정치 행사다. '민중(Folk) 회의(mødet)'로 번역되는 이 행사는 매년 6월 중순 보른홀름에서 사흘간 열린다. 코로나19 대유행이던 2020년을 제외하고 매년 개최되면서 정치·경제·사회적 이슈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다양한 시각과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는 대화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다. 폴케뫼데 기간 10만명가량이 다녀갔고, 2019년에는 하루 4만5000명에 달하는 방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올해 폴케뫼데는 지난달 15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됐으며, 2800여개에 달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좌우 구분 없다"…덴마크 정당 한 자리에
지난달 16일 방문한 폴케뫼데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쏟아졌다. 우선 주요 무대 인근에는 10개가 넘는 정당 텐트가 들어섰다. 덴마크는 원내정당만 16개에 달하는 다당제 의회로 유명하다. 집권당인 사회민주당(Socialdemokratiet)은 중도적 성향이며, 온건당(Moderaterne)과 급진자유당(Radikale Venstre)도 중도 계열로 분류된다. 적녹동맹(Enhedslisten)과 사회인민당(Socialistisk Folkeparti), 대안당(Alternativet) 등은 진보 성향, 자유당(Venstre)과 자유동맹당(Liberal Alliance), 덴마크인민당(Dansk Folkeparti) 등은 보수 계열 정당이다.
이날 폴케뫼데에선 각 정당이 다른 정당 소속 정치인을 불러 자유롭게 토론을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례로 대안당 텐트에선 급진자유당 소속 의원을 섭외해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시민들 더욱 많이 참여시키는 방법'에 대한 대책을 함께 모색했다. 사회민주당 소속 예페 브루스(Jeppe Bruus) 덴마크 조세부(Taxation) 장관도 이날 사민당 텐트를 찾아 고등학생부터 60대 이상 고령층까지 남녀노소가 참석한 가운데 토론을 벌였다.
이는 거대 양당이 극한 대립을 하는 국내 정치권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집권당인 국민의힘과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와 김건희 여사의 양평 땅 특혜 의혹이 제기된 서울-양평 고속도로 건설계획 백지화를 놓고 격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없고,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는 '혐오의 정치'가 이어지는 동안 국민들의 정치 불신과 반감은 더 커지고 있다.
하지만 폴케뫼데에서 만난 정치인들은 시민들과 스스럼없이 토론하고 정책 대안을 찾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브루스 장관은 "이곳에서는 시민과 정치인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함께 대화를 나누기 쉽다"면서 "오늘은 인플레이션 등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많이 얘기를 나눴고 조세 제도 전반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 등을 묻는 분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내각 각료들과 시민의 만남이다. 이날 오후부터 진행된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의 연설을 듣기 위해 30분 전부터 인파들도 붐볐다. 자리를 잡지 못한 참가자들은 바닥에 앉아 연설을 기다렸다. 관객석에 앉아있던 총리는 전날 개막사에 이어 이날 시민들과 만남에서도 '적극적인 안락사'를 주제로 연설했다. 일각에서 야유가 나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연설을 경청했다.
다양한 정치·사회 시민단체도 참여
폴케뫼데에 참여한 수백개의 단체는 축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국내 시민·사회단체가 주말마다 서울시청이나 광화문 광장 등에서 집회와 시위 방식으로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폴케뫼데 참가자 표정도 대체로 밝았다. 스티나 쇠와르타(Stina Soewarta·57) 유럽위원회(EC) 디지털 경제 및 경쟁력 강화 위원회 위원장은 "이곳에서는 다른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토론을 할 수 있다"면서 "온라인 공간이 아닌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있는 이곳에서 토론을 할 수 있으니 매우 특별해진다"고 말했다. 정신의학 관련 협회(BEDRE PSYKIATRI) 의장인 매즈 엥홀름(Mads Engholm·50)은 "이렇게 작은 공간에 모두 모일 기회는 흔치 않다"며 "45분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토론이지만 우선순위를 잘 정하면 많은 장소에 참여하고 다양한 관점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청소년들의 활발한 참여도 눈에 띄었다. 코펜하겐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에서는 10학년(우리나라 고등학교 1학년) 학생 100여명이 올해도 폴케뫼데에 참석했다. 동행한 교사 에릭 가트(Erik Gath·56)는 "민주주의와 사회 참여에 대해 배우려고 한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법에 대해 배우는 것"이라면서 "기후나 우주, 지역 정치 등 다양한 주제가 있고 본인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선택해 듣는다"고 설명했다. 덴마크는 어린 시절부터 정당 내 청소년 위원회 등 정치단체에 가입하고 있으며, 정규 교과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배운다.
지난해 폴케뫼데를 다녀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5명 중 4명의 참가자는 폴케뫼데가 대화와 민주주의를 강화한다고 답했다. 이 때문인지 시민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18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폴케뫼데를 찾은 아말리에 팔(Amalie Pall·30)은 "축제에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무료로 진행되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면서 "보통은 어떤 목적을 갖고 이곳을 방문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올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수의학을 공부 중인 비요르그 헬스바드(Bjorg Helsbad·27)는 축산 농가의 기후 변화 위기 대응 해법을 찾고 싶어 이날 폴케뫼데를 찾았다고 했다. 헬스바드는 "대부분 조직이나 정당, 홍보하고 싶은 사업 등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여기 있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홍보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폴케뫼데가 열리는 보른홀름이 덴마크의 유명 관광지인데 섬이라는 특성 탓에 행사 기간 항공과 선박이 빠르게 매진되는 데다, 숙박비도 급격히 오른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혔다. 행사장 텐트 설치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정치 엘리트'를 위한 행사라는 지적도 있다.
보른홀름 지역구 국회의원 "모든 사람이 민주적 절차에 참여해야"
"폴케뫼데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치의 일부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폴케뫼데가 열리는 보른홀름을 지역구로 둔 레아 베르멜린(Lea Wermelin·38) 사회민주당 국회의원은 덴마크 코펜하겐 국회의사당(Christianborg Palace)에서 진행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모든 사람이 민주적인 절차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폴케뫼데가 추구하는바"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베르멜린 의원은 "(폴케뫼데는)의회처럼 구조화된 정치적 의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제안과 토론을 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자리"라며 "국민들이 자유롭게 참석하고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토론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폴케뫼데에선 수천개의 조직과 회사, 협회, 정당 및 시민단체 등이 참가했다. 주제는 텐트마다 자율적으로 준비하는데,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토론할 수 있다. 그는 "시민사회, 참석하는 단체, 기업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를 듣고 영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 위해 국무총리도 그곳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던 베르멜린 의원은 이번 폴케뫼데에서 농업 부문의 친환경화를 통해 기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곤충이나 식물성 재료를 사용한 요리를 선보였다. 베르멜린 의원은 "정치인들이 의회라는 공식적인 정치 환경에서도 영감을 얻을 수 있지만 이런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시민들을 만날 때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보른홀름=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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