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건국의 의미와 제헌의 가치

2023. 7. 1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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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한 나라의 건국은 새로운 통치 시스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이 혁명에 의해 이루어지건,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이루어지건, 건국의 기초는 헌법이다. 이전 왕정 시대에는 그러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세습하며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국가는 헌법적 기초하에서 새롭게 탄생한다.

미국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다음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대통령제와 삼권분립의 정치체제를 헌법에 기초하여 창조해냈다. 왕이 독점해왔던 국가의 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 세 개의 권력으로 나누고 국가의 최고책임자도 왕이 아닌 대통령으로, 국민 선택에 의해 일정 기간 국가권력을 위임받아 국가를 다스리는 형태로 설계한 것이다.

「 헌법은 국가 정체성의 근원 가치
제헌절은 대한민국 출범의 상징
공휴일서 제외한 정부의 몰이해
제1공화국과 제헌 의미 되새겨야

우리나라는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어 미군정 3년을 거친 후 1948년 5월 31일 초대 국회가 제헌국회로 출범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 초안은 유진오 고려대 교수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신을 계승하여 임시정부 헌장에 명시된 민주공화제를 헌법 1조로 삼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에 이어 헌법 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여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세웠다.

초대 국회에서 마련된 헌법은 1948년 7월 12일 국회를 통과하여 17일에 서명, 공포, 발효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초대 왕으로 즉위한 날인 7월 17일을 제헌절로 삼았다고도 한다.

이런 제헌절이 3·1절, 광복절, 한글날, 개천절과 함께 5대 국경일임에도 불구하고 공휴일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주 5일 근무제를 추진하면서 쉬는 날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이유로 이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했고, 이명박 정부가 이를 시행했다. 하지만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제헌의 가치가 이처럼 소홀하게 취급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 국가 종교가 없는데도 석가탄신일, 개천절, 성탄절은 공휴일인데, 제1공화국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국체의 근간인 제헌절이 노는 날들이 많다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제외한 정부의 판단은 이해하기 어렵다. 유치원,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요즘 아이들은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제헌절이 무슨 날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노르웨이는 5월 17일 헌법제정일에 마을마다 퍼레이드를 하며 대축제로 기념한다. 인도, 폴란드, 덴마크, 스페인, 우크라이나 등 수십 개 국가에서도 헌법제정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그 의미를 기리고 있다. 일본도 5월 3일을 헌법기념일로 제정하여 평화헌법 수호를 외치고 있다.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헌법 준수를 골자로 한 취임선서를 한다. 국회의원들도 자신들이 헌법기관임을 내세우며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선서한다.

우파정부에서 기업 이익을 위해 공휴일을 줄이려고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했다면 헌법의 가치를 무시한 것이다. 혹시 좌파정부에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 출범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근거가 되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우려할 만한 일이다. 다행히 보수진영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한정애 의원이 20대 국회에서, 윤호중 의원이 21대 국회에서 제헌절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발의해 기대를 해본다.

최근 김황식 전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이사장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 아들 다섯 명이 모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를 비롯한 진보, 보수진영의 많은 원로가 기념관 건립 추진에 뜻을 같이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이 논란 속에서 아직도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영화인 신영균 회장은 서울 한강 변 개인 부지 4000평을 기념관 건립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했다.

영국 기자가 1952년 한국의 개헌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우리는 군사독재정권의 개헌시도에 반대하고 헌법의 기본 가치를 지켜내면서 오늘의 민주주의와 세계 10위권의 경제발전을 이루어냈다. 그 출발선이 제헌이고 제1공화국이다. 그런데 ‘헬조선’을 젊은 세대에게 전파하며 건국의 의미와 제헌의 가치를 폄훼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는 막아야 한다. 건국 초기의 혼란이나 전직 대통령들의 공과는 오랜 기간에 걸친 역사적 평가에 맡겨 두어야 한다. 학창시절 읽었던 수필가 김소운의 목근통신에 나오는 ‘나병 환자의 조국’이라는 대목이 잊히지 않는다. “내 어머니는 ‘레프라(나병 환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오늘 민주화와 경제 선진화를 이룬 출발점은 대한민국 건국이고 그 근간은 제헌임을 명심해야 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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