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홍의 시선]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는 대입 개혁
한국과 미국에서 대입 제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사교육 주범으로 수능 킬러 문항을 언급하며 입시 제도의 공정성 논란에 불을 붙였다. 미국에선 연방대법원이 소수 인종 우대 대학 입학 혜택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위헌으로 결정해 찬반 논란이 뜨겁다. 한·미의 대입 제도 논란이 국가적 논란으로 번진 까닭은 대학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교육의 공정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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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득격차가 교육격차로 직결
부유층 자녀가 명문대 휩쓸어
저소득층 선발 비중 늘려가야
」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8~24세 미국인 3100만 명 중 0.2%인 6만8000명만이 아이비리그(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미국 북동부 8개 명문 사립대)에서 공부한다. 기부금 규모가 각각 530억 달러(약 69조원), 360억 달러(약 47조원)에 달하는 하버드대·프린스턴대 등이 학생 수를 늘린다면 대학 문턱이 다소 넓어질 텐데 이들 대학은 학교 위상을 흔들 수 있는 정원 늘리기에 별 관심이 없다.
미국 교육 전문가들은 아이비리그 대학이 체육 특기자, 동문 자녀 우대, 기부금 입학제, 교수·교직원 자녀 우대라는 잘못된 관행만 청산해도 입시 공정성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버드대의 경우 이런 관행으로 입학한 학생이 전체의 43%에 달한다.
미국 명문대에서 체육 특기자라고 하면 농구를 잘하는 흑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은 부유층 백인들이 많다. 체육 특기자의 65%가 백인이다. 이들은 라크로스·보트·조정 등 부자들이 하는 운동을 한다. 엘리트층의 학력 대물림 수단이 된 동문 자녀 우대 입학의 수혜자도 주로 돈 많은 백인이다. 기부금 입학제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하버드대 졸업생인 아버지의 250만 달러 기부 덕에 하버드대에 입학한 사례에서 보듯 부유층 자녀들이 혜택을 독점한다.
소수 인종 우대 입학 제도로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겉으로는 혜택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가장 큰 혜택은 돈 많은 백인에게 돌아간다. 이들은 양육과 초중고 교육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데서 나아가 대입에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좋은 대학에 간다.
한국은 동문 자녀 우대, 기부금 입학제, 교수·교직원 자녀 우대 등이 없다는 점에선 미국에 비해 대입 제도가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대입도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지 오래다. 부유층과 저소득층의 자녀 사교육비는 크게 차이 난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월 소득 800만원 이상 가구의 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월 64만8000원인데 반해, 월 소득 200만원 미만 가구는 12만4000원에 그쳐 격차가 5배 넘게 벌어졌다.
부유층의 사교육 투자는 명문대 진학으로 이어지고, 이 추세는 심해지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SKY) 신입생 장학금 신청자의 50%가 고소득층인 소득분위 9~10구간 학생으로 집계됐다. 5년 전보다 13%포인트 늘어났다. 반면 기초생활수급·차상위·소득분위 1~2구간의 저소득층 학생 비중은 2021년 11.6%로 5년 전보다 10%포인트 하락했다. 명문대 진학이 계층 이동의 주요 사다리인 상황에서 계층 이동성이 둔화하고 있다는 경고 신호다.
부유층이 자녀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까닭은 좋은 대학 진학이 자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얻어 인생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사교육 수요는 클 수밖에 없다. 수능 킬러 문항이 사교육을 조장한 측면이 있지만 킬러 문항이 사라졌다고 사교육이 크게 줄지는 않을 것이다. 사교육은 학생 잠재력을 키우지 못한 채 교육 불평등을 심화하고 세계 최저 출산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교육이 공정한 사회에 이바지하고 계층 이동의 수단이 되려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넓어져야 한다. 이스라엘은 소득 기반의 적극적 옹호 정책(Class-based Affirmative Action)으로 사회경제적 취약 계층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의 문을 넓히고 있다.
한국 사회가 활력이 넘치고 지속해서 발전하려면 출신 집안과 관계없이 유능한 학생이 대학에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대입에서 저소득층 학생의 선발 비중을 높이는 건 대학의 다양성과 사회의 역동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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