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우리의 삶에 우레가 지나가더라도

2023. 7. 12.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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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장마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제주에도 꽤 많은 비가 내렸다. 땅이 마르기 전에 비가 내렸고, 웅덩이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또 비가 내렸다. 물 위에 물을 보탰다. 비가 연일 오니 몸도 마음도 축축하게 젖은 것만 같다.

빗줄기가 세져 빗물이 땅 위로 넘치면 장화를 신고 비옷을 입고 물길을 내러 나갔다. 위쪽 밭에서 물이 넘어오지 않는지도 살폈다. 쓰러진 화초와 작물도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 잠시 비가 멎으면 내 집뿐만 아니라 동네 집집이 풀을 뽑았고,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바람에 헝클어진 것들이 그렇게 틈틈이 조금씩 회복되고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 빗소리 가득한 장마의 나날들
밤에는 맹꽁이 소리 왁자지껄
큰비에도 꽃은 피고 열매 맺어
궂은 일도 괜찮다고 여겼으면

마음 읽기

비가 오려고 할 적에는 기미와 전조가 없지 않다. 제비들은 아주 낮게 난다.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즐긴다. 바람은 가볍고 보드랍게 자꾸 일어 풀이며 꽃을 민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면 널었던 빨래를 걷고, 이것저것 내놓았던 것을 창고로 옮겨 넣어두고, 마당을 쓸고, 텃밭에 비료를 뿌리기도 한다. 비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구름과 바람이 활동하는 것을 읽어가며 거기에 맞춰 나도 움직이는 것이다.

최하림 시인의 시 가운데 ‘장마’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밤새 앞 강물이 크게 불었다. 서시천의 다리가 물에 잠기고, 들과 마을의 구별이 없어지니 물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 이따금씩 바람이 떼 지어 지나가고 구름이 모여들어 꺼매진 하늘이 개울에 비쳤다. 뿌리 뽑힌 잡초들도 떠밀려갔다. 어머니는 그런 풍경이 두려운 듯 부엌에서 마루로 곳간으로 종종걸음치고, 그때면 수양버들도 가지를 솟구치며 하늘에 길을 내어 새들을 날게 하였다.’

큰비가 내려 온 세상에 물이 가득하면 사람의 마음도 불안해지고, 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애가 타고 조마조마해 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서두르고 급히 걷는 걸음을 통해 드러냈다. 장마 때에는 누군들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밤이면 맹꽁이 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시골에 살면서 여름날에 다시 보고 듣게 된 것 중에 단연 반딧불이와 맹꽁이 우는 소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렸을 적에 고향에서 만났던 것들이다. 이 빛과 이 소리는 보고 들을수록 참으로 신묘했다. 이들은 나를 더 깨끗한 자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려는 것만 같았다. 훼손되지 않은 본래의 자연 속으로, 사람과 문명의 손이 덜 닿은 자연 속으로 나의 이목을 끌어 데려가 보이려는 것만 같았다. 맹꽁이 소리가 끊이지 않고 왁자해서 처음에는 잠을 설쳤지만 이제는 그것을 자연의 멋진 음악으로, 자연의 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게도 되었다.

젖은 옷을 입고 사는 듯한 장마철에도 산뜻한 일은 일어난다. 그제 옆집에서 참외를 큰 그릇에 담아 들고 왔다. 장에 가서 샀더니 단맛이 잘 들었다며 나눠 먹자고 했다. 나는 그 그릇에 옥수수를 담아 손에 들려 드렸다. 일일이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옥수수수염을 떼 놓았던 것을 한 차례 쪄서 맛을 보시라고 드렸다. 잔잔한 미소가 서로에게 오갔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요란하게 불어도 해바라기는 노랗게 피었다. 작년에 자랐던 곳에 씨가 떨어져 스스로 발아하고 자라더니 꽃을 근사하게 피웠다. 올해 처음으로 참외 모종과 수박 모종을 텃밭 한쪽에 심었는데, 어제 보니 주먹만한 수박이 열려 있었다. 해바라기와 수박을 보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 우레가 지나갈 때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나가는 그 생명의 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 마당에서 보이는 무화과나무밭에는 무화과 열매가 제법 커가고도 있었다. 개중에는 벌써 익은 것도 눈에 띄었는데 산새 한 마리가 무화과나무 가지에 앉아 열매를 쪼아가며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장마가 지나가고 불볕더위가 찾아오면 머잖아 무화과를 하나둘씩 수확할 수 있을 듯했다.

큰 밭에서는 사람들이 노지 수박을 따고 있었다. 지나가며 생각하길, 저 밭에서 막 딴 수박을 한 통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장마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이렇게 비바람과 함께 여름의 자연은 성장할 것이다.

이승훈 시인의 유고시집에는 ‘무엇이 움직이는가’라는 시편이 실려 있다. 시인은 ‘그럼 됐다. 그럼 됐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릎을 펼 수 있는 작은 정자면 된다. 나처럼 병이 든 노인이 걷다가 잠시 무릎이나 펴고 앉으면 된다’라고 썼다.

당신의 처지를 낮춰서 말하고 있는 이 시구에는 자족이 잘 느껴진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너무 상황이 나쁘다고 여기지도 말고, 이만하면 됐다고, 그럼 됐다고, 그런 일도 있으려니 생각할 일이다. 지루한 장마의 때를 살면서도 젖은 것은 젖은 대로 보고, 마른 것은 마른 대로 볼 일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우레가 지나가더라도.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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