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식품기업, 죄수의 딜레마
최근 식품기업들이 벌인 눈치싸움은 치열했다.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의 가격 인하 ‘권고’에 누가 먼저 투항할 것인가가 업계 관심사였다.
결국 라면·제과·제빵·제분업체 일부가 줄줄이 백기를 들었다. A사는 대표상품 가격을 50원 내린다고 발표한 후 30여분 사이 정정 보도자료를 두 차례 냈다. 출고가 인하율 등을 잘못 표기해서였는데, 최대한 빨리 정부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조급함이 만든 실수로 보였다. B사는 조율할 게 많아 며칠 걸린다더니 몇 시간 뒤 가격인하안을 뚝딱 만들어냈다. 경쟁사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남는 게 별로 없는 업계 사정상 가격을 못 내린다던 C사는 올 1분기 영업이익률이 1%도 안 되는 경쟁사가 가격인하를 발표하자 전전긍긍하고 있다. 다음 표적이 될까 걱정하는 기업도 많다.
이들은 마치 ‘죄수의 딜레마’에 처한 듯 보였다. 공범들이 따로 조사받게 됐을 때 이론적으론 다 같이 잡아떼는 게 최선이지만, 다른 공범이 먼저 자백해 자기만 중형을 받을까 봐 죄를 시인하게 된다는 게임이론이다.
현재 식품기업은 ‘탐욕 인플레이션’(기업 탐욕에 의한 물가 상승)의 주범 취급을 받고 있다. 라면·빵·과자가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고 영업이익률이 한 자릿수(평균 5%)라는 점은 참작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업 입장에선 자신과 경쟁사가 값을 내릴 여력이 있다는 자백(가격 인하)을 안 할 수도 있었다. “국제 밀 가격은 내렸어도 다른 원료는 비싸고 인건비·전기요금도 올라 여력이 없다”면서다.
하지만 결국 여러 기업이 가격을 내렸다. 주요 제품은 뺀, 소비자에게 큰 도움은 안 되는 생색내기식이라도 말이다. 공정위 담합 조사까지 거론되니 가격 인하에 나서야 선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여론이 잠잠해질 때 원상복귀하면 된다는 생각도 했을 터다.
13년 전에도 그랬다. 2010년 “밀가루 가격이 내렸는데 서민 먹거리인 라면 가격 등은 그대로”(당시 중앙일보 기사)란 여론이 일자 여당은 공정위에 식품업체 가격 담합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자 제빵·라면·제과업체들은 가격을 내렸다가 13~21개월 뒤 다시 가격을 올렸다.
지금은 2023년이다. 올 초 한 식품사 최고경영자는 K푸드 해외 매출과 영업이익률 증가를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다른 나라엔 시가총액이 삼성전자와 맞먹는 식품사도 있다. 우리도 식품산업이 부가가치가 낮은 내수 업종이란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물가관리 방식은 13년 전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세계를 봐야 할 K푸드사도 내수용 눈치싸움이나 하고 있다.
백일현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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