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허수경의 ‘잘 가’
허수경 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는 ‘잘 가’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잘 있니’라는 말의 앞과 뒤에 ‘잘 가’라는 말이 등장한다. 전생과 이생의 사이에서 발화된 안부로 등장한다. 이 두 글자에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자니, ‘잘 가’라는 말을 내가 하고 있게 된다. 화답으로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메아리로 발생되는 말 같기도 하다. 오래 곱씹고 있자니, 시인은 이 말을 아주 많이 사랑했을까. 아니면, 이 말만이 최후에 남은 한마디였을까. 이처럼 간명한 말이 허수경의 문장 속에서 흘러나오면, 어째서 으스러지게 사무치는 것일까.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잘 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여’(오렌지)라고 마지막 말을 건넨다. 그가 가는 그곳은 ‘원점’이므로, 해줄 말과 나눌 악수가 많아도 예의를 다해 정갈히 보내주려고 건네는 한 마디. 그가 떠난 곳은 다름이 아닌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므로. ‘빙하기의 역’에는 할머니·아주머니·아가씨로부터 시작해서 태아까지의 시인이 등장한다. 플랫폼의 벤치에 앉은 채로 전생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도 ‘잘 가’라는 한 마디로 끝이 난다.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라는 문장이 시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 미처 기별을 제때에 넣지 못한 존재에게 뒤늦게 건네는 기별로써 ‘잘 가’라는 한마디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는 “잘…… 잘 자, 라는 말을 잘 가, 라는 말로 나는 착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사랑이 살 때 할 수 없었던 말을 이제야 한다”라며 “잘, 이라는 말을 밤하늘의 별로 숨겨놓고 싶다”고 고백해 놓았다. 허수경에게 ‘잘 가’라는 말은 해야 했으나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한 한마디 기별이었나보다. 별이 유독 많은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총총한 별들이 다르게 보일 것 같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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