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전문용어의 범람
1930년대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정신적 지배를 강화하는 행위를 말한다. 연극에서 남편은 오락가락하는 가스등 불빛과 소음을 아내의 착시와 환청이라고 주장한다. 절도 행각을 숨기기 위해서다. 처음엔 아내도 반신반의하지만 결국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점점 남편에게 의존하며 자아를 잃어간다.
대단한 학술용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단어가 심리학이나 사회학 논문에 등장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일상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가 된 경우다. 전문용어가 일상에 뿌리내린 사례는 의외로 흔하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소시오패스 등이 그렇다. 주로 심각한 상태나 부정적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려운 의미를 담은 만큼 복잡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만, 일상에서 쉽게 쓰다 보니 오남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가스라이팅만 해도 거짓말·사기·세뇌 등과는 구분돼야 하나 묘하게 비틀어 쓴다.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부쩍 눈에 띄는 ‘가스라이팅 당했다’는 문장엔 ‘나는 당했을 뿐, 내 과실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자신의 피해를 강조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의도다. 최근 한 축구선수의 사생활을 폭로한 이가 그랬다. 의학적 판단이 필요한 병증(病症)인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역시 언젠가부터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습관적으로 쓰는 범상한 용어가 됐다. 실제 증상과는 무관하게 ‘내 상태가 이 정도다’ 또는 ‘나를 좀 이해해달라’는 속뜻이 담긴 듯하다.
전문용어의 일상화가 꼭 나쁜 건 아니다. 우울증이란 단어를 자주 접하다 보면 예방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색안경을 벗고 환자를 이해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재미있는 표현을 만들어내는 건 언어 사용자의 욕구이기도 한데, 경우에 따라 전문용어가 말맛을 살리는 역할도 한다. 충격적인 경기 결과에 대해 ‘PTSD 제대로 오네’ 같이 표현하는 식이다. 이런 게 요즘 스타일 유머이기도 하다.
다만 결코 가벼이 여겨선 안 될 단어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건 문제다. ‘웃자고 한 말’이라고 넘어갈 수도 없다. 정확한 뜻을 알고 있는지 사용하기 전 한 번 고민해보면 될 일이다.
장원석 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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