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장마와 정원
보름간 집을 비웠다. 깜깜한 밤, 긴 여정을 마치고 속초 집에 들어서니 백합의 진한 향기가 후텁지근한 공기와 함께 코를 진동시켰다. 향수병을 쏟은 듯한 농도에 이미 백합이 만개했음을 알아차렸다. 백합은 늘 장마와 함께 꽃을 피워 고생을 참 많이 한다. 장마철이긴 해도 맑은 날도 본다. 며칠 비가 내린 후 활짝 개는 청명한 하늘은 얼마나 눈부신지! 참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맑은 하늘을 늘 장마철에 보게 된다.
비는 정원사에게 동전의 앞뒷면처럼, 반갑기도 하지만 근심이기도 하다. 여름철 땡볕에 타들어 가는 땅을 적셔주니 식물엔 더 없는 해갈이지만, 지나치면 피어난 꽃도 녹아버리고 잎도 주저앉게 된다. 같은 온대기후라고 해도 위도가 높은 영국 등 서유럽은 여름이 건기라 오히려 잔디가 누렇게 마른다. 그러니 우리 같은 여름철 위기는 겪지 않는다. 추위가 식물에 가장 치명적인 듯 보여도 정원에선 의외로 여름을 이겨내지 못하는 식물이 많다. 찬 바람을 좋아하는 자작나무도 습도 높은 장마나 열대야에선 수명을 다할 때가 많고, 건조한 기후를 자생지로 둔 톱풀·은사초·로즈마리·라벤더·달리아도 매우 위험해진다.
오는 비를 막을 수도 없으니 이 식물들을 도와줄 방법도 딱히 없다. 다만 키 큰 식물은 꺾이지 않게 지지대를 세워주면 좀 낫고, 가늘고 촘촘한 잎을 지닌 은사초나 털수염풀 등은 아예 잎을 짧게 잘라주면 장마가 지난 후 다시 새싹을 돋우기도 한다. 잔디도 물을 오랫동안 머금고 있지 않게 바짝 잘라주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모든 식물에 장마가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담에 ‘장마가 길면 대추가 여물지 못하고, 장마가 짧으면 삼이 덜 자라 삼베를 못 만든다’는 말이 있다. 뭐든 다 좋고 다 나쁜 일은 없다. 장마도, 땡볕 여름도 지나가야 가을이 찾아오고 겨울이 온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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