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하버드대 다양성의 두 얼굴

윤석만 2023. 7. 11. 2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 연방 대법원이 내린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소수인종 대입우대 정책)’ 위헌 판결로 미국 전역이 들썩였다. 한국에서도 많은 언론이 비중 있게 이 소식을 전하며 큰 화제가 됐다. 마침 국내에서도 ‘킬러 문항’을 비롯한 사교육 문제와 입시 공정성을 놓고 뜨거운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은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영향으로 시작됐다. 1961년 존 F 케네디와 1965년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이 인종·국적에 따른 차별금지와 적극적(affirmative) 우대 조치의 근거가 담긴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하버드대 등 여러 대학이 소수인종을 배려하는 입시 정책을 도입했다.

「 어퍼머티브 액션, 아시안 역차별
사회지도층 동문 우대도 불공정
인위적 다양성 위한 차별은 안돼

일각에선 이번 판결을 정치적 이슈로 본다. ‘낙태권 폐기’ 판결 때처럼 6대 3으로 나뉜 보수 우위의 대법관 성향대로 결론 났기 때문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을 합헌으로 봤던 1978년 대법원과도 정반대였다. 그러나 단순한 정치적 진영 논리로만 이번 판결을 해석해선 안 된다. 45년 전과 지금은 인종적 구성 등 입시 환경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으로 흑인의 명문대 입학률이 높아지는 등 차별시정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인종 가산점이 오히려 백인과 아시안을 차별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1일 ABC방송 조사에 따르면 어퍼머티브 액션이 폐지되는 것에 대해 백인(찬성 60%)·아시안(58%)과 흑인(25%)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번 소송을 주도한 ‘공정 입학을 위한 학생들(SFA)’은 스펙이 비슷할 때 하버드대 입학 가능성은 아시안(25%)·백인(35%)이 히스패닉(75%)·흑인(95%)보다 훨씬 낮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아시안(6%) 인구는 히스패닉(19%)·흑인(14%)보다 소수지만, 오히려 소수우대정책의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드대가 어퍼머티브 액션을 고수해온 이유는 뭘까. 판결 직후 하버드대는 “혁신적인 교육과 연구는 다양한 배경과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커뮤니티에서 나온다”며 “진보와 변화를 위해선 토론과 이견이 필요하고 다양성은 필수”라고 했다. 그러면서 “각계각층의 구성원들이 있는 활기찬 커뮤니티는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하버드대의 설명은 교육·연구 측면에서 보면 백번 옳다. 창의적 혁신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진화론에서도 개체의 다양성이 종의 생존에 유리하다. 그러나 하버드대가 원하는 커뮤니티 다양성이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보편적 권리보다 우위에 있진 않다. 차별시정을 위해 도입한 제도가 시대적 소명을 다 하고, 오히려 인종차별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또 다른 특례인 레거시 입학(legacy admission)도 공정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지난 3일 미국의 비영리단체 ‘시민권을 위한 변호사(LCR)’에 따르면 하버드대 입학 가능성이 기부 관련 지원자는 7배, 동문 지원자는 6배 정도 높다. LCR은 “2019년 졸업생의 약 28%가 동문 자녀”라고 했다. 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전문직이거나 정관계, 기업계 인사들로 향후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하버드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레거시 입학 제도는 어퍼머티브 액션과 정반대의 사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버드대가 말하는 커뮤니티 다양성 측면에서 보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다소 학력이 부족해도 좋은 집안 출신의 동문 자녀가 있는 게 커뮤니티 다양성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이 다원성을 높이고, 추후에 이들은 기부금 또한 많이 낼 가능성이 크다.

다양성만 놓고 본다면, 기계적이든 인위적이든 여러 인종·계층의 구성원을 골고루 유지하는 게 좋다. “복잡한 세상의 리더를 양성하려면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온 학생들”(하버드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가 계층 상승의 주요한 수단이고, 하버드대의 설명처럼 대학이 “부모·조부모가 꿈꿀 수 없었던 꿈을 이룰 수 있는 장소”라면 그 기회가 누구에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옳다.

인종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우대하지 않고, 소득·자산과 같은 객관적 지표로 취약계층을 배려하는 건 필요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시안과 백인도 흑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단지 타고난 피부색 때문에 명문대 입학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공정하지 않다. 커뮤니티 다양성을 중시하는 하버드대의 뜻은 알겠지만, 인위적인 다양성 유지를 위해 누군가 제도적으로 차별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글=윤석만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