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측' 대신 '대한민국' 쓴 北…연락사무소 폭파 때와 닮았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11일 미군의 전략 정찰기가 자신들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상공을 침범했다며 "침범이 반복되면 위태로운 비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김여정은 미국을 직접 지목해 위협을 가하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해당 공역과 관련한 문제는 우리 군과 미군 사이의 문제"라며 "입을 다물라"고 했다.
특히 김여정은 한국을 지칭하며 그동안 사용해왔던 '남측' 또는 '남조선' 등의 표현 대신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이란 말을 썼다. 북한이 공식 성명에서 한국의 정식 국호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을 '민족'의 개념이 아닌 '제3국'으로 규정하겠다는 의미로, 외교가에선 북한이 한국을 '외국'으로 규정하며 대남 도발을 위한 명분을 만들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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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군부 깡패들 입 다물어야"
김여정은 이날 대외용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담화에서 "대한민국의 군부는 또다시 미군의 도발적 행동과 관련하여 중뿔나게 앞장에 나서 '한·미의 정상적인 비행활동'이라는 뻔뻔스러운 주장을 펴며 우리 주권에 대한 침해 사실을 부인해 나섰다"고 밝혔다. 이어 "해당 공역과 관련한 문제는 우리 군과 미군 사이의 문제"라며 "대한민국의 군부 깡패들은 주제넘게 놀지 말고 당장 입을 다물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대한민국'이란 호칭을 쓴 것은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버리고 앞으로는 한국을 '외국'과 같은 지위로 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공식 담화나 성명, 입장발표에서 남한을 대한민국이라고 지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파악된다"며 "북한의 의도와 향후 태도를 예단하지 않고 예의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남조선에 총포탄 안 쏜다”서 호칭 달라져
익명을 원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은 "북한은 그간 '우리(북한)는 남조선을 겨냥해 총포탄 한 발도 쏘지 않을 것'이라거나 '남조선을 무력의 상대로 보지 않는다'는 논리를 핵·미사일 고도화의 명분으로 삼아왔다"며 "북한이 민족이라는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한국을 제3국으로 본다는 것은 '대남 도발'을 벌이기 위한 명분 쌓기의 일환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여정은 지난해 4월 담화 땐 "남조선을 겨냥해 총포탄 한 발도 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는데 이날은 '대한민국'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北 하루 새 세 차례나 '공식입장' 업데이트
북한은 지난 이틀간 세 차례에 걸쳐 미국을 직접 겨냥한 담화와 성명을 쏟아냈다. 특히 세 차례 중 두 번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의 명의로 나왔다.
전날 국방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군 정찰기가 자신들의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던 북한은 김여정 명의의 두 차례 성명을 통해선 미군기가 EEZ 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김여정은 이날 성명에서 "지난 10일 미 공군 전략정찰기는 5시15분부터 13시10분까지 강원도 통천 동쪽 435㎞~경상북도 울진 동남쪽 276㎞ 해상상공에서 동해 우리 측 경제수역 상공을 8차에 걸쳐 무단 침범하면서 공중 정탐행위를 감행했다"라며 시간과 장소 등을 구체적으로 특정했다. 사실상 미국을 향해 거듭 경고를 보내며 '격추' 가능성을 시사한 말로 풀이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이 하루 사이에 세 차례의 담화를 발표한 것은 단순한 담화전·여론전의 범위를 뛰어넘는 일"이라며 "북한이 미국을 향해 실제 군사적 행동을 가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크지만, 시기와 장소를 특정한 형식의 성명은 북한이 실제 군사적 행동을 예고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또 북한이 11일부터 이틀간 리투아니아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와 다음 주 한·미 핵협의그룹(NCG) 첫 회의를 앞두고 의도적인 위협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국제사회의 제재에 몰려있는 북한이 주요 회의를 앞두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에 대한 책임 전가와 군사도발에 대한 명분 쌓기에 나선 모습"이라며 "8월 한·미 연합 훈련까지 예정된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 긴장 고조는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어처구니 없는 억지 주장
이날 김여정이 미군이 침범했다고 주장한 EEZ는 기준선이 되는 연안에서 200해리까지 영역을 의미한다. 천연자원 탐사 등의 경제 주권은 인정되지만, 국가의 주권이 배타적으로 미치는 범위인 영해·영공(12해리)의 개념과는 다르다. EEZ를 기준으로 주권 침해를 주장한 김여정의 성명은 법적 근거가 없는 억지 주장이란 의미다. 억지 논리를 꺼내든 데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됐을 가능성이 있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평양의 비행정보구역을 고려해 보면 북한은 자신들이 선포한 경제수역 상공을 방공식별구역(ADIZ·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북한이 과거 미군을 공격했던 사례까지 들어가며 성명을 낸 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닌 행동을 위한 명분 쌓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위임' 강조…연락사무소 폭파 때와 유사
김여정은 특히 이날 성명에서 "위임에 따라 우리 군의 대응 행동을 예고했다"고 주장했다. "미군이 매우 위태로운 비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위협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메시지란 의미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김정은의 지시라는 점을 강조한 배경과 관련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번 성명의 패턴과 내용은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했을 당시와 상당히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북한은 당시에도 생트집에 가까운 논리를 동원해 남측을 몰아붙이다가 결국 실제 행동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특히 북한이 미국을 향해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기엔 더 큰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도발의 대상은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여정이 직접 나선 만큼 북한이 실제 군사적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있지만, 직접 미국을 상대로 하기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며 "그러나 한반도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갖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북한이 남측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크다"고 말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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