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의 리더로서 시국 대처
[김삼웅 기자]
▲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 이병길 |
김옥균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급전하는 내외정세 속에서 개화파의 결속과 진로를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모색하였다.
김옥균은 우리나라가 '쇄국'으로부터 '개국'으로 이행한 새로운 정세에 대처하여 장차 도래할 국정개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설계도를 작성하는 데 진력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은 이 사업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약육강식을 생활법칙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 발전역사가 더욱 광폭한 제국주의 단계에로 과도하는 정세에서 후진국으로 남아 있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고 그를 위해서는 선진제국의 경험으로부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도를 연구 섭취하여 국정개혁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주석 11)
▲ 개화승 이동인 조선의 개화를 위해 장벽인 일본과 한양을 드나들며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정보를 개화파에 제공하였다. |
ⓒ 이병길 |
일본의 실상을 좀더 자세히 알고자 김옥균은 절친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키로 하였다. 이와 관련 <서재필박사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하루는 김옥균이가 동지 여러 사람을 데리고 서대문 밖 새절 즉 봉원사로 놀러갔다. 그리하여 가보니 중 한 사람이 있어 매우 공손하고 말도 잘 하고 공부도 많이 한 모양인데 이 중이 처음으로 사진을 보여 준단 말이야. 세계 여러나라의 도회지며 군인의 모습같은 사진을 요지경이라는 글라스로 보여주니 매우 재미가 있었지… 그리고 <만국사기>라는 책 한 권도 보여주기에 김옥균이가 이러한 책을 또 구할 수 있느냐 물은 즉 돈만 있으면 구해 올 수가 있다고 그러지 않어……
이에 그렇다면 어디서 그렇게 구할 수 있느냐 물은 즉 그의 대답이 자기는 부산 사람으로 일본말도 하는 터이니… 돈만 주면 일본 가서 구한다는 것이라, 그후 김옥균이가 돈을 마련해 주면서 일본가서 책이며 여러 가지 물건을 사오라고 부탁했더니 자기가 다녀오자면 줄잡아 두어 달 걸리겠다고 하기에 김옥균이 대답하기를 두 달이건 석 달이건 걸리는 대로 다녀오라고 부탁하였지…… 그런데 과연 두어달 후에 그 중은 약속한대로 여러 가지 책이며 사진이며 성냥 같은 물건을 많이 사가지고 왔단 말이야.
그리고 이때 가져온 책 중에는 역사도 있고 지리도 있고 물리, 화학 같은 것도 있어 서너 달 동안은 남몰래 그 절에 다니며 이러한 책들을 보고 배우기도 하였지……그런데 이 시절에는 이러한 책을 보다가 들키면 사학(邪學)으로 몰려 중벌을 받게 되는 만큼 얼마 후에는 장소를 동대문 밖 영도사로 옮겨 다시 남몰래 읽고 공부하였지……그러니 다시 말하면 이동인 이라는 중이 우리들을 개화파로 인도해주었고 따라서 우리들은 그러한 책을 읽고 그러한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라 봉원사 새 절이 우리 개화파의 본상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라…… (주석 13)
1879년 9월 일본에 간 이동인은 각계 인사들을 접촉하고 그 중에는 대표적인 자유민권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1835~1901)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김옥균 방일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 김옥균과 동지적 관계인 예조참의 김홍집이 일본수신사가 되어 도쿄에 왔다. 유기치도 친교가 있었던 터라 조우하고, 김홍집은 귀국할 때 청국인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고종에게 바치고, 이 책은 조야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은 이 책에서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막기 위해서 조선은 친 중국(親中國), 결 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 해야 한다는, 조선의 '외교지침'을 담고 있었다. 개인의 저술이라기보다 청국의 대(對) 조선 외교방략이다.
김옥균은 급전하는 정세에 개화파의 실질적 리더로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1874년 이후 김옥균은 개화파의 영수로서 개화운동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이 개화파의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개화사상의 창시자들인 유대치, 오경석 등이 그를 지도하여 개화파의 지도자로 육성한 사실과 관련된다.
그것은 중인 출신들인 유대치, 오경석이 국정을 좌우할 만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적 차별이 강한 조건에서 그들의 활동무대가 제한되어 있었던 당시 사회적 환경과도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술한 바와 같이 그들은 오랫동안 인재를 탐색하였고 드디어는 '일대혁신'을 위한 '동지를 북촌의 양반 자제'들 속에서 선발하였으며 그 후 모든 것을 그에게 일임하였던 것이다. (주석 14)
주석
11> 김석형, 앞의 책, 20쪽.
12> 앞의 책, 21쪽.
13> 김도태, <서재필박사 자서전>, 63쪽, 을유문고, 1972.
14> 오길보, 앞의 책,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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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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