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작가, 반세기 만에 부활

홍성식 2023. 7. 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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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된 <동해산문> 과 <인생산문> 의 저자 한흑구의 삶

[홍성식 기자]

 <동해산문>과 <인생산문> 복간본.
ⓒ 득수출판사
 
최근 포항의 한 출판사가 50여 년 전에 발간된 한흑구의 수필집 <동해산문>(1971)과 <인생산문>(1974, 일지사)을 복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 문단에서 한흑구는 생소한 존재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국어 교과서에 실린 <보리>와 <닭 울음>은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필집이 복간된 직후엔 포항에서 북콘서트가 열렸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릴레이 낭독회도 이어지고 있다. 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문화적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한흑구는 누구이고 수필집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수필집 복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흑구가 거의 매일 거닐었다는 포항 해변의 한 찻집에서 이번 수필집을 책임편집 한 김도형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김씨는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 등을 편집한 이력이 있다.
 
 경북 포항 남빈동 자택에서의 한흑구.
ⓒ 한동웅 제공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사회의식에 눈 떠

- 한흑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예술가 앞에는 수식어를 붙여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흑구 앞에 붙일 수 있는 적절한 수식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한흑구는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나 미국과 평양, 서울에서 다양한 장르에 걸쳐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48년 가을 포항에 정착한 후로는 '은둔의 사색가'로 살았다. 그 때문에 한국 문학사에서는 사실상 '잊힌 존재'가 되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살다 간 지성 중에 비슷한 유형을 찾아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 어쩐지 얘깃거리가 많은 사람 같다.
"그렇다. 한흑구는 단순한 문인이 아니다. 한흑구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부친 한승곤(1881∼1947)을 알아야 한다. 평남 강서 출신인 한승곤은 평양 산정현교회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목사가 된 선각자였고, 1916년 미국으로 망명해 흥사단의 의사장을 맡았다. 1936년 귀국했고 이듬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돼 3년간 옥살이를 했다. 한흑구는 1929년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니면서 흥사단 활동을 했고 1934년 귀국 후 수양동우회 사건 때 피검돼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 수양동우회 사건이 한흑구 부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는 독립운동사와 문학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흥사단을 만든 안창호는 수양동우회 사건 때 투옥돼 후유증으로 1938년 3월 숨을 거두었고, 수양동우회 핵심인 이광수와 주요한은 일본에 전향했다. 당연히 한흑구에게도 일본에 협력하라는 압박과 회유가 이어졌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뒷날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한흑구를 일컬어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라는 헌사를 바쳤다."

- 한흑구의 미국 시절부터 구체적으로 얘기해달라.
"한흑구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노스파크대학교 영문과를 다녔다. 이때 시를 열심히 썼는데 영시도 꽤 잘 썼다. 영문과 학과장이 학교 명의로 시집을 내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노스파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에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템플대학교 신문학과를 다녔다. 이 무렵에 교민단체인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흥사단 기관지 <동광> , 북미조선학생총회 기관지 <우라키(The Rocky)> 등에 시와 평론, 소설, 영미 문학 번역 등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작품 행간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독립을 갈망하는 심정이 배어 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34년 귀국했고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국으로 가려 했지만 총독부가 여권을 압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평양에서는 잡지 <대평양>과 <백광>의 창간에 참여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광복 직후 북한에서는 살기 어렵다고 판단해 38선을 넘어 미군정의 통역관이 되었지만 부정부패에 질려 그만두었다. <문화일보>에서 1년 정도 편집을 하다가 1948년 가을 포항으로 왔다."

- 영미문학 번역에서 한흑구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영미문학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과정에서 한흑구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 김학동은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에서 '1930∼40년대 한흑구의 번역은 당시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흑인문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 한흑구다.

한흑구는 1920년대 흑인 문예 부흥의 기수인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에 주목했다. 랭스턴 휴스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한 억압과 차별을 받고 있는 흑인의 안타까운 현실을 노래했다. 한흑구는 <인생산문>에서 언급했듯 랭스턴 휴스의 시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의 목소리를 에둘러 전하려 했다."
 
 한흑구, 방정분 부부.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방정분은 포항에서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 한동웅 제공
출세 가능한 서울 떠나 포항에 정착한 이유는

- 포항에는 무슨 이유로 갔는지.
"직접적인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걸 치료하려면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권유가 있었다. 또 하나는 곧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영어에 능한 한흑구는 국내외 정세에 밝았다. 폐병을 치료하고 전쟁도 피할 수 있는 곳은 남쪽의 바다였다.

한흑구는 틈나는 대로 남쪽의 바닷가를 찾아다녔다. 1948년 가을 동료 문인들과 경주에 고적지 순례차 왔다가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포항에 잠깐 들렀고 그 직후 서울의 식구들을 데리고 사고무친한 포항으로 왔다. 포항 바다를 보자마자 매료된 것이다."

- 수필집 얘기로 넘어가자. 50여 년 전의 수필집을 복간한 이유는.
"한흑구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세 권 있다. 1949년에 나온 <현대미국시선>과 1971년에 나온 수필집 <동해산문>, 그리고 1974년에 발간된 <인생산문>이다. 한흑구를 이해하려면 우선 두 권의 수필집을 읽어봐야 하는데 오래전에 절판되었고 중고서점에서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한흑구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앞서도 말했지만 한흑구가 포항에 정착한 후로 1979년 작고할 때까지 '은둔의 사색가'로 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필집을 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인이 책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후배 손춘익(아동문학가, 2000년 작고)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수필집을 엮게 되었다.

최근 문단 일각에서 한흑구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고, 포항시 차원에서 한흑구 문학관 건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가이기도 한 포항의 득수출판사 김강 대표가 한흑구를 한국 문학사에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해서는 두 권의 수필집을 복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 수필집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돼 있는지.
"수필 83편이 실려 있고, 이효석, 유치환, 조지훈, 서정주, 김광주 등 당대 문인들과의 교우록도 있다. 여기에는 죽마교우(竹馬交友) 안익태와의 미국 시절 이야기도 포함된다. <수필의 형식과 정신> 같은 수필론에서는 수필에 관한 수준 높은 담론이 펼쳐진다."

- 한흑구의 수필 세계를 설명해준다면.
"한흑구는 1974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학세계에 대해 '과거에는 민족적인 것이 배경이었고 그다음은 자연과 인간 속에 미를 찾아 헤맸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작품을 썼고, 포항에 정착한 후로는 자연과 인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수필을 썼다.

한흑구는 자연 속에서 성스러움을 찾고 사명을 깨달았으며, 이러한 자세는 작품에 일관되게 투영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 창작되어야 하고, 철학이 그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한흑구의 수필은 시적이면서 철학적이다. 대표작 <보리>는 물론 <나무>, <노목을 우러러보며> 등 대부분의 수필이 그렇다."
 
 한흑구와 문우들. 왼쪽부터 황순원, 손춘익, 한흑구. 한흑구와 친분이 깊었던 황순원은 여러 차례 포항을 방문했다.
ⓒ 한동웅 제공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작곡가 안익태 등과 교류

- 문단 교우록도 흥미로울 것 같다.
"당시 문인들이 어떻게 어울렸는지 눈앞에 보일 듯이 생생하게 서술돼 있다. 한흑구의 장남 한동웅(85)은 '아버지가 서울 시절에 가장 친했던 문인은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였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온 김광주와 미국에서 온 한흑구는 서울에서 만나 거의 매일 함께 술을 마신 '주붕(酒朋, 술친구)'이었다. 두 사람은 <문화일보> 편집도 함께했다.

한흑구는 청마 유치환과도 가까웠다. 두 사람은 평양과 서울을 거쳐 부산 피난 시절, 그리고 포항까지 인연이 이어졌다.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청마가 포항으로 한흑구를 찾아와 밤을 새우며 통음한 이야기가 교우록에 남아 있다. 조지훈과도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수필집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부산 피난 시절 한흑구는 동광동에서 조지훈을 우연히 만났는데 얼마나 반가웠던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꽉 부둥켜안고 볼에 입술에 키스를 퍼부어댔다. 또 조지훈이 포항으로 한흑구를 찾아와 수평선 위에 달이 떠올라올 때까지 늦도록 술을 마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 안익태를 '죽마교우'라고 표현했는데.
"두 사람은 평양 시절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안익태가 세 살 많지만 두 사람은 형제보다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안익태는 일본을 거쳐 미국 신시내티음악학교에 다녔는데 돈도 없고 영어도 서툴러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침 한흑구가 음악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흑구를 찾아가 큰 신세를 졌다. <인생산문>의 <예술가 안익태>에는 고학생 한흑구가 안익태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픽션적인 이야기는 한 오라기도 첨가하지 않고' 펼쳐진다."

- 50여 년 전의 책을 복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한흑구는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다. 이를 테면 수필에 쉼표가 빈번히 등장한다. 한흑구의 문학이 시에서 출발하고, 시적인 수필을 썼기에 이런 스타일이 나오는 것이다. 한흑구는 여러 장르의 글을 썼지만 그의 본질은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편집 방향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고민도 많이 했는데 한흑구의 스타일을 최대한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출판사 대표도 나와 같은 판단을 했다. 다만 맞춤법,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법 등은 국립국어원의 어문 규범에 따랐고, 일부 오류는 바로잡았다. 지금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문인, 단체, 지명에 대해서는 각주를 달아 한흑구의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 조그만 지역 출판사에서 수필집을 낸 것도 이채롭다.
"지방의 소멸이 운위되고 출판도 사양 산업이 된 상황에서 포항에 문학 전문 출판사가 세워진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 수필집이 얼마나 팔리겠는가. 그럼에도 김강 대표는 수필집 복간을 흔쾌히 결정했다. 한흑구가 반평생을 산 포항에서 한흑구의 수필집을 복간했다는 것은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한흑구 문학관 건립은 어떻게 돼 가는지.
"포항시 차원에서 한흑구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현재 문학관 건립 타당성 연구 용역이 진행되고 있고 오는 8∼9월에 최종 보고회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학관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자료의 확보다. 다행히 한흑구의 장남이 아버지의 자료를 잘 보관하고 있어서 내실 있는 문학관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 수필집 발간 후에 또 해야 할 일이 있는지.
"유고작도 있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이것도 책으로 엮어야 할 것이다. 출판사에서 원고를 검토하고 있는데 만약 출간이 이루어진다면 출판사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전집도 발간해야 할 것이다."
 
 포항 송도 해변을 걷고 있는 한흑구.
ⓒ 한동웅 제공
'영성 체현한 사람' 한흑구의 문장을 읽는 즐거움

- 얘기를 듣고 보니 한흑구는 문학사를 넘어 한국 지성의 계보에서 정말 드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흑구가 중학생 때 미국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너는 십일홍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이 되어라'라고 썼다. 한흑구는 나라의 재목이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출중한 영어 실력에 친화력과 매너도 좋았다. 체격도 좋았고 운동도 잘했다.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았으며 산정현교회 초대 한인 목사의 외아들이었다. 그런 사람이 39살에 인구 5만여 명에 불과한 한적한 소도시에 와서는 조용히 반평생을 보냈다. 폐병도 치료했고 전쟁도 지나갔으면 다시 서울로 가야 할 텐데 거의 매일 바닷가를 거닐며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진정한 한흑구 연구는 이 물음에 답을 구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 수필집 편집자로서 한흑구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지.
"문학 작품은 읽는 사람마다 해석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나는 한흑구를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로 받아들인다. 한흑구의 수필을 찬찬히 읽어 보면 그는 종교의 핵인 영성을 깊이 체현한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영성은 아버지의 망명과 구속, 정신적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의 죽음,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순교 등 숱한 비극을 겪으며 체현한 것이기에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흑구의 수필 곳곳에는 잠언 같은 명문장이 빛을 발한다. 이런 수필집을 또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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