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시장이 노다지…적기 투자의 미학
지난해 영업이익률 45%
POM 한길 걸은 코오롱플라스틱
전기차 시대 맞아 영업익 폭증
"투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기"
기업들은 신기술을 적용한 첨단 장비를 들여와 최신 제품 만들기 경쟁을 벌인다. 보통 이 경쟁에서 뒤처지면 미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꼭 상식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한물간 장비로 생산한 제품으로 대박을 내는 기업들이 있다.
DB하이텍은 작년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영업이익이 7687억원으로 전년(3991억원)보다 92.62%나 늘었다. 작년 매출액도 38% 증가한 1조6753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률이 45%에 달한다. 영업이익률이 10%만 넘어도 장사를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판이다. 영업이익률 45%는 비상식적인 수준이다.
DB하이텍이 이런 기록적인 실적을 낸 이유는 역설적으로 첨단 장비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반도체 업체들이 만든 공장에 들어가는 반도체 원재료는 12인치(300㎜) 웨이퍼다. 웨이퍼를 잘라 회로를 새겨 넣어 칩을 만든다. 그 전엔 8인치 웨이퍼를 썼다. 12인치 웨이퍼를 쓰면 반도체를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생산 장비도 달라진다. 고가의 첨단 장비를 써서 좀 더 미세한 회로를 그려 넣는다. 12인치 웨이퍼와 장비로는 주로 최신 메모리 반도체,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대량 생산한다. 8인치는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8인치 생산 라인에서는 주로 가전제품 등 상대적으로 회로가 덜 복잡한 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만든다. 쉽게 말해 8인치 생산라인은 상대적으로 만들기 쉬운 반도체를 다품종 소량생산, 12인치 라인은 제작 난이도가 높은 첨단제품을 소품종 대량생산한다. 8인치 생산라인 건설비용은 1조원 이하였다. 하지만 요즘 삼성전자가 만드는 12인치 생산라인 건설비용은 30조원이 넘는다. 심지어 평택에 만들고 있는 최신라인은 50조란 추정치도 돈다. 삼성전자는 많이 벌지만 번 만큼 최신 생산라인 건설에 재투자한다. 매출이 많아도 당장 이익이 나지 않을 수 있는 구조다.
DB하이텍은 2001년 4월 8인치 공장에서 첫 양산을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8인치 생산라인만 돌리고 있다. DB하이텍이 생산하는 제품은 구형 아날로그 반도체(DDI, 이미지센서, 전력관리반도체 등). 주로 가전제품, 노트북, PC 등에 들어간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가전제품 판매가 늘었다. 또 전기차에 들어갈 반도체 수요가 폭발했다. 가전제품이나 전기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복잡한 회로가 필요한 제품은 아니다. 쉽게 말해 8인치 생산라인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덕분에 DB하이텍은 올 1분기 반도체 불황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대형 업체들이 조단위 적자를 내는 상황에서도 829억원의 영업이익을 봤다. 영업이익률은 27.8%로 대만 TSMC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다. 대형 반도체 업체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는 주로 12인치 웨이퍼를 사용하는 생산라인만 세웠다. 업계에선 현재 삼성전자 8인치 대 12인치 생산 비율이 30 대 70에 이를 것으로 본다. 발 빠른 대규모 투자가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물갔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변해 다시 불타오르는 제품도 있다. 코오롱플라스틱의 플라스틱 소재 '폴리옥시메틸렌(POM)'이 대표적이다. 코오롱플라스틱은 1996년 회사 설립 후 꾸준히 POM을 생산했다. 내열성과 강도가 뛰어나 성장 잠재력이 있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재료였지만 최근까지도 큰 재미를 보진 못했다.
하지만 전기차가 제품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배터리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전기차는 경량화를 위해 POM이 필요했다. 기존에 쓰던 철강 제품 대신 철강 못지않은 강도를 가지고 있지만 가벼운 POM이 전기차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생활가전 판매가 증가한 것도 POM 수요가 많이 늘어난 배경이었다. 2016년까지만 해도 POM 가격은 t당 1392달러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t당 2700달러 수준으로 치솟았다. 6~7년 전보다 가격이 두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보통 시간이 지나면 소재 가격이 내려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POM은 뒤늦게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특이한 제품이다.
코오롱플라스틱 영업이익은 2020년 이후 2년간 11배 치솟았다. 2020년 매출액 2952억원, 영업이익 39억원이었던 이 기업은 2021년 매출 4053억원, 영업이익 277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매출액 5181억원, 영업이익 460억원을 기록해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코오롱 한 임원은 “꾸준히 성실하게 제품을 생산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시장이 폭발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다른 업체들이 지금 시황이 좋다고 다시 공장을 만들어 제품을 생산하기는 쉽지 않다. 기껏 투자했는데 몇 년 후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예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장보다 한발짝 앞서 투자한 업체는 소위 대박을 터뜨리지만 너무 성급하게 투자하거나 과잉투자를 해서 낭패를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과잉투자로 재고가 쌓여 고생하고 있다. 투자 경쟁에 취해 스스로 반도체 불황을 자초한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 신규투자를 미룰 수는 없다.
업계 관계자들은 “투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기”라고 말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돈을 쌓아 놓은 DB하이텍과 코오롱플라스틱이 언제 신사업을 위한 투자에 나서는지 지켜보고 있다. 증권가에선 DB하이텍이 12인치로 전환하는 데 일정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12인치 사업 진출에)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당분간은 8인치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DB하이텍 관계자는 "12인 파운드리는 투자 규모, 수요처와 기술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업 규모를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며 "정부 지원과 팹리스 수요처, 반도체 설계자산(IP)을 보유한 기술처와 파트너십을 통해 단계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겠다"고 설명했다.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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