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살고 싶었다"…새출발 앞둔 '이웃' 탈북민들
"南 드라마 보고 인권 알아…당당하게 살고파"
"한국 사회에 감사…열심히 일해서 보답할 것"
권영세 "그저 北 고향인 이웃으로 포용해달라"
북중 접경지역에 살던 20대 여성 김하나씨(가명)는 2016년부터 당국의 세관 단속이 강화되면서 먹고 살기가 곤란해졌다. 국경지대는 세관을 통해 몰래 들여오는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당국이 밀수를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아예 수입이 끊겨버린 것이다. 기본적인 생활용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자, 김씨는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북한의 국경이 봉쇄되기 전인 2019년의 일이었다.
국경을 넘은 김씨는 중국의 어느 가정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악착같이 일했지만, 마땅한 신분이 없는 그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중국인의 절반. 혹여나 공안에 붙잡혀 북송될까 외출도 쉽지 않았다. 신분증이 없는 그에겐 기차를 타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남한으로의 탈북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언젠가 한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인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며 "사람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목숨 건 탈출…"한국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김씨와 2014년 탈북한 30대 여성 한지원씨(가명), 2004년 북한을 떠난 30대 여성 이정은씨(가명) 등 3명은 10일 경기 안성시에 위치한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서 통일부 출입기자단과 만났다. 각기 다른 시기에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에서 신분을 숨기고 지내던 이들은 수개월 전 한국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하나원에 머물면서 '한국살이'를 배우고 있다. 남한으로 온 모든 탈북민은 정보 당국의 기본적인 조사를 거쳐 하나원에서 12주간 정착 교육을 받게 된다.
한씨는 처음 탈북을 결심했을 땐 오히려 두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챙겨야 할 가족도 없으니 '내 몸 하나 건사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지내면서 지켜야 할 아이가 생겼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선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보니 (북송이 우려돼) 당당하게 살 수 없었다"며 "우선 안전해지고 싶었고 나와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한국으로 향하는 결심에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10년 가까이 중국에서 신분을 숨기고 지내던 한씨는 요즘 꿈이 많아졌다. 그는 "이전에는 꿈꿀 수 없던 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며 "한국에 오니 내가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생각할 수 있고,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하나원에서) 가르쳐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교육도 받고 많은 도움 속에 살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세금을 많이 내 보답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있다"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북한의 배급제가 무너지면서 '꽃제비'까지 했다는 이씨는 10대 때 북한을 탈출했다.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장마당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엄마의 물건들은 경비대에 빼앗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언니들과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는 "말이 안 통해도 처음에는 중국이 북한보다 낫구나 싶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신분증 검사가 너무 힘들어졌다"며 "한국에 가면 신분증도 주고 잘 살 수 있다고 해서 오게 됐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선(死線)을 넘나든 이씨는 가장 결연한 어조로 성공적인 정착을 다짐했다. 그는 "북한에서 그렇게 못 살고 힘들게 지냈는데, 한국에서 힘껏 노력한다면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교육도 많이 받았고 나가서 살림을 꾸려 나가는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원에서 배운 내용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신 하나원과 국정원은 물론 탈북민을 도와주는 한국 사회에 너무 감사하다. 덕분에 힘껏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라고 했다.
권영세 "탈북민도 우리 이웃, 포용적 태도 필요"
통일부에 따르면 탈북민 누적 입국인원은 3만3882명으로 집계됐다. 함경도·양강도 출신(85%)이 가장 많고, 대체로 여성(72%)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탈북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2030세대가 57%를 차지하며, 현시점으로 환산하면 3040세대가 가장 많다.
김정은 집권 전 연 3000명을 웃돌던 탈북민은 1000명대로 점차 줄어든 뒤 코로나19 사태 이후 두 자릿수까지 급감했다. 최근 추이를 보면 2019년 1047명, 2020년 229명, 2021년 63명, 2022년 67명으로 나타난다. 올해 1분기에는 34명이 입국하면서 코로나19 완화에 따라 소폭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다만 중국의 '강제북송 정책'과 안면 인식 CCTV, 반간첩법 개정안 시행 등 감시망 강화로 중국에 신분을 숨기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탈북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하나원은 탈북민이 줄어드는 양상에 맞춰 '맞춤형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서정배 하나원장은 "하나원에 머무는 동안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본인의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원에선 봉제, 요리, 제과제빵, 피부미용 등 다양한 진로 실습을 진행 중이며 이미 기본교육을 수료한 탈북민도 '재교육' 차원에서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다. 상반기 기준 33개 과정에 238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217명이 교육을 수료하고 163명이 자격증 취득까지 마쳤다.
직업 선택만큼 중요한 것은 탈북민의 '정신 건강'이다. 서 원장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호소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고, 일반 국민과 비교하면 정신과 진료 비율이 5배"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하나원은 의사·간호사·치위생사·간호조무사 등 전문인력 25명이 상주하는 '하나의원'에 더해 하나원-하나재단-하나센터로 이어지는 '마음건강 지원체계'를 구축했다. 탈북민이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사후 모니터링을 지속하기 위해서다.
통일부는 이날 하나원 개원 24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프레스 데이'를 통해 하나원 시설 및 교육 과정을 내·외신 언론에 공개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싫어하는 탈북민 사안을 공개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묻는 말에 "지난 정부와 달리 북한의 인권 문제나 탈북민 정착·지원 및 보호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것이 새 정부의 방침"이라고 답했다. 이어 "우리 시선이 개방적으로 변해야 한다"며 "이방인이 아니라 북한이 고향인 이웃으로 대하는 포용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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