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우먼톡]당시 조선은 정순왕후의 나라였다

2023. 7. 10. 14: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할머니였던 그녀는 사극에서 정조에 맞서 음모를 꾸미거나, 정조가 죽은 뒤 그의 업적을 모두 파괴한 악녀로 그려진다.

정조가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귀양 보내 죽게 했는데도 말이다.

직접 간호를 하러 찾아온 정순왕후는 죽어가는 정조를 보자마자 소리 높여 통곡했다.

정조가 승하한 뒤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맡았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수렴청정때 공노비 해방
女主로서 업적 평가받아야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할머니였던 그녀는 사극에서 정조에 맞서 음모를 꾸미거나, 정조가 죽은 뒤 그의 업적을 모두 파괴한 악녀로 그려진다. 반면 6만명 넘는 공노비를 해방시킨 위대한 업적은 자주 잊힌다.

1759년, 열다섯 살 정순왕후 김씨는 예순여섯 살 영조와 혼례를 올린다. 왕비라고는 하나 이미 영조는 많은 후궁들을 두고 있었다. 다음 왕위를 잇게 돼 있던 사도세자는 정순왕후보다 열 살 연상이었고, 아들까지 있었다. 고로 정순왕후는 비어 있는 왕비 자리를 채웠을 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3년 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이때도 정순왕후는 왕비였지만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린 데다 자식을 낳지 못해서 입지가 클 수 없었다. 영조가 승하하고 대비가 되면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우기는 했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마냥 죽고 죽이는 살벌한 사이는 아니었다. 정조가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귀양 보내 죽게 했는데도 말이다.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1790년, 정조는 이복동생이지만 역모 죄에 휘말려 귀양 가있던 동생 은언군을 몰래 데려와 함께 논 적이 있었다. 신하들은 아무리 동생이라도 왕이 죄인과 지내면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정조는 "싫다"며 거부했다. 왕인 자신은 따듯한 온돌방에 있지만 너희들은 추운 바깥에 있으니 버텨보라며 약을 올리기까지 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정순왕후는 "요즘 주상의 미간을 보아하니 말하는 거와 얼굴빛이 사고를 칠 거 같았다"며 몸소 궁궐 밖으로 나서는 초강수를 뒀다. 결국 정조는 은언군을 돌려보냈다. 이런 일을 보면 정순왕후는 정적이라기보다 말썽꾸러기 동생을 단속하는 누나 같다.

이런 두 사람의 이별 순간은 참으로 슬프다. 독살을 당했다는 소문과 달리, 정조는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직접 간호를 하러 찾아온 정순왕후는 죽어가는 정조를 보자마자 소리 높여 통곡했다. 그런 정순왕후의 울음을 그치게 한 것은 신하들의 외침이었다. "왕이 죽으면 세자(순조)는 어리고 나라의 어른은 정순왕후와 혜경궁밖에 없으니, 감정적이 되지 말라"는. 아무리 슬퍼도 마음껏 내보일 수 없었던 게 그녀의 처지였다.

정조가 승하한 뒤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맡았다. 그리고 1801년 1월28일, 공노비 혁파를 선언했다. "선조(先朝)께서 내노비(內奴婢)와 시노비(寺奴婢)를 일찍이 혁파하고자 하셨으니, 내가 마땅히 이 뜻을 이어받아 지금부터 일체 혁파하려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조는 누구일까. 영조였을까, 정조였을까. 어느 쪽이든 조선은 정순왕후의 나라였다. 그리고 조선은 신분제사회였다. 노비는 가장 하층의 신분. 해마다 신공을 바치고, 때로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그래서 부모처럼 백성에게 베풀기 위해서 공노비를 혁파했으니,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된 노비 수가 6만6067명이었다. 노비 문서들은 돈화문 바깥에서 불태워졌다.

물론 정순왕후 혼자 이 모든 일을 해낸 것은 아니다. 영조를 비롯한 다른 왕들도 노비들의 신공을 줄여주며 조치를 취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순왕후가 나선 뒤에야 마침내 폐지됐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저 빈자리를 채운 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해냈던 여주(女主)로서 말이다.

이한 작가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