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㊺] ‘기브 앤드 테이크’를 저버린 순간 (이로운 사기)
관계는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라고들 말한다. 친구나 연인 등 사람 관계뿐 이겠는가, 기업 간 거래든 나라 간 무역과 외교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give and take, 주고받기, 준 만큼 되받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도 아니고 시간상 동시에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주고받기’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라, 우리는 많은 인간관계에서 먼저 주고 나중 받는 일이 흔하다. 양적으로도 봐도, 내가 준 딱 그만큼 되돌려 받기도 어려워서 적게 받아도 용인하기 일쑤고 준 것보다 많은 걸 원하면 ‘도둑심보’ 소리를 듣는다.
여러 제한이 있어도 give and take는 이뤄져야 관계가 지속된다. 받기만 하고 되돌려주지 않는 쪽은 ‘손절’ 당하기에 십상이고, 매번 준 것보다 많이 받기를 원하다 못해 그렇지 않았을 때 아쉬움을 드러내는 쪽은 ‘매장각’이다.
예외가 있으니 가족이다. 특히 부모 자식 사이. 자식이 받는 것만 알고 주지 않는다고 인연 끊지도 않거니와 뒤늦게라도 주면, 받은 것의 100분의 1만 줘도 감지덕지하는 게 부모 마음이다.
그런데, 부모도 아니면서, 형제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연인관계도 아니면서 먼저 주고 나중 받기에 나섰다면. 되돌려 받으려는 것도 내가 준 것과 똑같은 종류도 아니고 되레 받은 쪽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우리는 이 준 사람을 뭐라 불러야 할까.
기존에 나와 있는 단어 중에 가장 가까운 게 ‘키다리 아저씨’가 아닌가 싶다. 언제 되돌려 받을지 모르면서 무작정 주고, 되돌려 받으려는 것도 내가 준 물질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만족감이자 받은 상대의 성장이니 말이다. 드라마 ‘이로운 사기’(제작 스튜디오드래곤·넥스트씬, 연출 이수현, 극본 한우주)에서 ‘키다리 아저씨’를 보았다.
변호사 박규(이창훈 분)는 인생 수렁에 빠진 후배 변호사 한무영(김동욱 분)를 건져와 많은 것을 주었다. 살 집도 주고, 먹고살 돈이 나올 직장도 주고, ‘과공감증후군’이라는 심리적 병인이 치료되도록 상담도 받을 수 있게 했다. 마음의 병이라는 게 뚝딱 고쳐지는 게 아니다 보니 중간중간 ‘과공감’해서 벌어진 사고들의 뒷감당도 해왔다.
이렇게 해서 그게 얻는 건 무얼까. 최상으로 예상해도 법무법인에 유능한 변호사를 확보하는 정도다.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목표로 한다고 보기에 박규 변호사는 매우 현실적이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악의 무리와도 얼마든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능글맞음도 지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서라(정애리 분), 제이(김태훈 분), 장경자(이태란 분), 강경호(이해영 분)와 함께 ‘적목 회장’ 후보로 언급되기도 한다. 악의 세력 적목이 우수한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듯, 가둬놓고 가스라이팅 하고 억압해서 필요한 바를 쏙쏙 뽑아먹듯, 그러나 조금 다른 방식으로(단체생활이 아닌 독방) 박규가 한무영을 양육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시청자 사이엔 존재한다.
섣부른 예단을 잠시 접고, 박규가 한무영에게 베푸는 것과 심적 지지를 보면 ‘친형’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선지 한무영도 박규를 법무법인 대표라기보다는 형처럼 대하고, 동네 형 아닌 혈육을 부르듯 ‘형’이라고 마음을 담아 부른다.
그런 박규에게도 ‘인내의 한계’가 왔다. 줘도 줘도 돌아오는 게 없다. 참고 기다려도 무영이 나아지는 게 없고 인생 ‘제자리걸음’으로 빙빙 도는 것 같아서다. 11회에서 드디어 규는 내심 서운함을 내비친다. 무영은 미안해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한다. 두 배우의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와 감정, 대사 연기만으로도 꽉 찬 명장면이다.
한무영의 집. 무영이 집안에 들어서면 선배 변호사 박규가 이미 빈 집 거실에 앉아 있다. 테이블에는 한무영이 조사, 취합한 이로움(천우희 분)에 관한 자료가 쌓여 있다.
규: 내가 좀 읽었다.
무영: 아, 이게…
규: 아니,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돼. 다 나와 있어서. 불쌍하네, 이로움. 그래, 네가 발 벗고 나설 만하다.
무영: 미안
규: 왜 나한테 미안하지?
무영: 내가 커리어 내던지고 남 돕는 거, 그거 막으려고 나 회사에 데려온 게 형이니까.
규: … (무영을 바라보는 눈가가 촉촉하다)
무영: 내가 이러는 게 형이 날 위해서 상담의 알아봐 주고, 아파트 내주고, 걱정해주고, 그랬던 걸 다 소용없게 만든 것처럼 느낄까 봐.
규: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지? 너, 나아지고는 있는 거야? 요즘, 계속 치료받고 있지?
무영: …
규: 왜 왜 안 받아, 다 나았어? 다 나았는데 어떻게 하다가 의뢰인 한 명한테 꽂혀서, 정직당하고도 그렇게 계속 파고 있는 거야?
무영: 내가 병을 치료하려고 했던 건 내가 싫어서였어, 형. 나는 내가 싫었어. 병이 있는 한 나는 아버지 말대로 쓸모없는 인간이었거든. 남 도우려고 변호사가 됐는데 방해만 됐어, 병 때문에. 병을 치료하려니까 이제 나한테 의뢰인들이 방해가 됐어. 끝이 안 보였어. 언제 완치될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쓸모없는 변호사로 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
규: 나는 너만큼 유능한 변호사 못 봤어.
무영: 내가 의뢰인들 골라서 받은 거 알잖아.
규: (공감이 발동하지 않을 의뢰인들로) 내가 다 골라줬지.
무영: 형 탓하려는 거 아니야. 설사 변호사로 실패하더라도, 다소 무모하더라도, 나는 그냥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형. 그 말, 하려는 거야.
규: (깊은 한숨, 또 한숨. 일어서서 나간다.)
무영: 형 (착잡한 표정)
두 배우의 공기를 가르는 목소리와 감정, 대사 연기만으로도 꽉 찬 명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를 보았다. 박규의 촉촉한 눈가에서, 적목 회장 후보에서 자의적으로 배제했다. 그리고 사람의 오늘을 어제보다 나아지게 하는 것, 오늘보다 나을 내일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해답 중 하나.
한무영을 낫게 하는 것, 아픈 어제와 선을 긋고 건강한 내일을 만드는 것은 ‘키다리 아저씨’의 헌신적 도움과 기다림이 아니다. 정확히는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을 받은 대가인 것처럼 키다리 아저씨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게 해답이 아니다. 누군가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가 정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배은망덕처럼 보일지라도.
무영은 규가 해준 것들 속에 살면서 규가 바라듯 치료를 열심히 받고 과공감증후군을 떨쳐내고 유능한 변호사로, 사회가 정한 ‘정상인’을 틀 안에서 살 수 있었다. 박규는 준 것에 대해 되돌려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한무영은 정말 행복했을까.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더 행복한 방법이라고 단정하지 않겠다. 다만, 자신 그대로, 타인의 아픔과 기쁨에 ‘과공감’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를 돕기도 하고 돕다가 실수하기도 하고 실수를 바로잡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길을 한무영은 택했고, 더 당당해 보인다. 나를 혐오하며 스스로 부정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거기서 출발해 인생길을 걸어보겠다는 한무영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인생에서 어느 길을 가는가 이상으로 그 길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걷느냐가 중요하다. 어느 길을 택하든 꽃길만 있을 수 없는데, 크든 작든 그 길에서 닥칠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가가 그다음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한다. 위기를 피하기보다 직면해서 해결해야 성취감도 자신감도 커져서 계속 걸을 힘을 만든다.
한무영은 용기 내 박규라는 목발을 내려놓고 스스로 걷게 됐다.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남도 도울 수 있다. 강인해진 한무영이 이로움을 어떻게 도울지, 한무영으로부터 공감을 분유 받은 이로움은 ‘적목 키드’들과 함께 어떤 선택을 해나갈지, 모두의 협업으로 적목의 실체를 밝힐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일단 오늘, ‘이로운 사기’ 13회를 방영하는 날이라는 게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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