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광고음악에 새겨진 '민족마케팅'의 증거

이준희 2023. 7. 1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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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과 거북선이 등장했던 1920~1930년대 CM송

[이준희 기자]

한국 광고음악 역사 자료를 찾다 보면 두꺼비 상표의 소주 노래가 첫 번째였다는 주장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1920~1930년대에도 상품 광고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대 경우와 달리 녹음이 전하지 않아 오늘날 직접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인데, 아쉬운 대로 악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곡조를 확인할 수는 있다.

'민족 마케팅' 적극 이용한 경성방직 

자료가 확인되는 1930년대 광고 노래 중 대표적인 것은 1936년 4월 신문 지면에 등장한 태극성 광목 노래이다. 1919년에 이른바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의 대표 상품이었던 태극성 광목은, 태극 문양 주변에 별 여덟 개를 배치한 상표 도안으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여덟 개 별이 뜻하는 바는 조선 팔도였다고도 하는데, 팔도까지 갈 것 없이 이미 태극만으로도 조선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동아일보> 1936년 4월 30일자 태극성 광목 광고에 실린 <조선물산장려가>가사와 악보.
ⓒ 동아일보사
일본 회사들에 비해 출발도 늦었고 품질도 뒤졌던 경성방직이었으므로, 조선 소비자들의 적극적인 구매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가격이나 품질 외에 '민족 마케팅'도 어느 정도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전략에 따라 기존 태극성 상표에 더해서 광고 노래까지 동원되었을 것이다. 가사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조선인이 자작자급을 해야 조선이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태극성 광목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일본 것을 쓰지 말고 우리 것을 쓰자는, 태극성 광목을 사서 쓰자는 광고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광고에 사용된 이 노래는 사실 태극성 광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10년 전부터 널리 불리고 있던 곡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 대중을 고무했던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1926년 가사 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조선물산장려가>가 바로 태극성 광목 광고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산에서 금이 나고 바다에 고기/ 들에서 쌀이 나고 면화도 난다/ 먹고 남고 입고 남고 쓰고도 남을/ 물건을 내어 주는 삼천리 강산/ 물건을 내어 주는 삼천리 강산
조선의 동무들아 이천만 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 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주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조선의 동무들아 이천만 민아/ 자작자급 정신을 잊지를 말고/ 네 힘껏 벌어라 이천만 민아/ 거기에 조선이 빛나리로다/ 거기에 조선이 빛나리로다" (<조선물산장려가> 가사. 곡조 듣기)

공모에서 당선된 가사는 당시 열다섯 살 학생이었던 윤석중이 지었는데, 뒷날 한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가가 된 바로 그 윤석중이다. 일반인들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곡조는 몇몇 전문가들이 각자 만든 작품 중에서 고르기로 했고, 논의 끝에 한국 최초의 피아니스트로도 잘 알려져 있는 김영환의 곡이 선정되었다.

기존 노래를 광고에 등장시킨 태극성 광목과 달리 광고를 위해 노래를 새로 만든 경우도 물론 있었다. 태극성 광목보다 앞서 1929년에 광고 노래를 사용한 거북선 고무신이 바로 그런 예이다. 거북선 고무신을 제조한 서울고무공사는 1924년에 설립됐고, 당초 인물 상반신 도안을 상표로 쓰다가 1929년부터 거북선 상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북선은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연상케 하므로, 거북선 상표 또한 경성방직 태극성 못지않은 '민족 마케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 1929년 6월 1일자에 실린 거북선 고무신 노래 현상공모 광고.
ⓒ 이준희
서울고무공사에서는 상표 변경과 함께 역시 광고노래를 만들어 홍보에 적극 사용했는데, 그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된다. 우선 1929년 6월에는 이순신 거북선과 거북선 고무신을 연결시키는 내용으로 가사를 만들어 보내 달라는 현상공모가 진행되었다. 이어 8월에는 공모 결과가 발표되었고, 경상북도 성주에 사는 성현(필명으로 추정)이라는 사람이 투고한 가사가 1등으로 뽑혔다. 1등 상금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 30원이었다.
당선 가사는 당초 민요 <이팔청춘가> 곡조에 맞춰 불렸다고 하며, 그 흔적이 서울고무공사에서 만든 노래책에서도 보인다. 1929년 10월에 간행된 <거북선 가요집> 광고 내용을 보면 첫 번째 곡으로 <거북선타령>이 등장하고, 이것이 <이팔청춘가> 곡조에 당선 가사를 붙인 첫 번째 광고노래였다. 물론 그 한 곡만으로 책을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거북선 가요집>에는 민요에다 유행가, 동요, 잡가, 심지어 일본 노래까지 총 170여 곡이 수록되었다.
 
 <조선일보> 1930년 8월 24일자 서울고무공사 광고에 실린 <거북선가> 악보와 가사.
ⓒ 이준희
'민족팔이'로 사익 추구한 걸까

해가 바뀌어 1930년 8월에는 서울고무공사 신문 광고에 <거북선가>라는 노래 악보가 또 게재되었다. <거북선타령>과 가사는 같지만 곡조는 새롭게 만들어 붙인 두 번째 작품이었고, 작곡자는 한국 양악의 선구자로 <학도가> 등을 만든 김인식이었다. 

"옛날에 옛날에 임진의 난리에/ 이순신 장군이 지으신 거북선/ 거룩한 거룩한 장군의 거북선/ 조선의 큰 자랑 세계의 첫 발명
삼백 년 긴 세월 지내인 오늘에/ 그 배의 후신이 고무신 되었나/ 이 신을 신고서 행진고 울리니/ 나도 이순인이 너도 이순신이
처음에 그 배는 널따란 바다를/ 육지와 같이도 다니고 있더니/ 지금에 이 신은 육지와 바다에/ 어느 곳 물론코 잘 돌아다니네" (<거북선가> 가사. 곡조 듣기)

더 앞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한국 광고음악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거북선가>는 전례도 없는 상황에서 그럼 어떻게 기획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명시적인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31년 이후 서울고무공사 이사로 재직한 기록이 확인되는 백명곤이 광고노래 기획을 제안하고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9년 당시에도 백명곤이 이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사가 아니었다 해도 그는 서울고무공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서울고무공사 설립을 주도한 '백만장자' 재력가 백인기가 바로 백명곤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막대한 부를 이룬 집안에서 태어난 백명곤은 요즘으로 치면 그야말로 금수저 재벌 3세와 같았다. 일본은 물론 독일 유학까지 갔던 그는, 건강 문제로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뒤 한동안 스포츠와 음악에 몰두했다. 아마도 집안에서는 탐탁지 않게 보았을 테지만, 백명곤의 활동은 한가하고 팔자 좋은 부잣집 도련님의 일시적인 취미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1928년 1월 상하이 원정 경기 당시 백명곤의 모습(오른쪽). <동아일보> 1928년 2월 3일자.
ⓒ 이준희
상하이와 도쿄에서 유학 중인 조선 청년 축구팀을 초청해 국내 팀과 함께하는 리그전을 여는가 하면, 조선축구단 이사장이 되어 팀을 이끌고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가 원정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모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었을 텐데, 백명곤은 재원 상당 부분을 부담하며 일을 성사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백명곤의 이름은 각종 음악회에도 자주 등장했다. 만돌린·첼로·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했던 그는, 급기야 여러 차례 함께 무대에 올랐던 홍난파 등과 더불어 1928년 코리안재즈밴드를 결성하기까지 했다. 그해 연초 축구 경기를 위해 갔던 상하이에서 다양한 악기를 사 가지고 온 것이 밴드 결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코리안재즈밴드는 음반을 녹음하진 않았지만 공연과 방송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에 쓰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금 5만 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자살을 시도하고, 집으로 기생들을 불러 술판을 벌이다가 한 명에게 맥주병을 던져 이를 부러뜨리는 등,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한량 백명곤에게는 구설도 많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1929년부터는 스포츠나 음악은 물론 사건사고 면에서도 그의 소식을 전하는 보도가 한동안 잠잠했다. 서울고무공사에서 광고노래 기획이 진행된 때와 공교롭게도 시점이 일치하는 것인데, 조선 최초의 재즈밴드를 이끌었던 백명곤이라면 광고에 음악을 도입하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듯하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코리안재즈밴드의 모습. 맨 오른쪽이 백명곤.
ⓒ 이준희
태극성 광목도 그렇고 거북선 고무신도 그렇고,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의 경제적 자립과 생활 여건 향상을 위해 광고노래까지 만들며 노력했던 모습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또 다른 어두운 일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성방직 설립자 김성수는 이른바 친일 문제로 논란이 가장 많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경제·교육·언론·정치 등 많은 분야에서 크고 깊은 발자취를 남겼지만,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는 언행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해 김성수의 자발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옹호도 적지 않으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의 이면을 달리 해석하고자 한다면 태극성 광목 광고에도 부정적으로 볼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아닌 말로 '민족팔이'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거북선 고무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처지가 어려운 고학생들에게 안정적인 생활 여건을 제공한다는 것이 서울고무공사 설립 취지이기도 했으나, 백명곤의 아버지 백인기 또한 친일적 행동을 마다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친일 명단에 오른 인물이 설립한 회사에서 일본 침략에 맞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광고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복잡다단한 한국 근대사의 아이러니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시대의 빛과 그늘이 교차하고 그에 대한 후대 평가가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리는 모습은, 가볍게 흘려듣기 마련인 시엠송과 별 관련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주제는 사소해 보이는 그런 일상사에도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피륙과 신발에도 당연히 역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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