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광고음악에 새겨진 '민족마케팅'의 증거
[이준희 기자]
한국 광고음악 역사 자료를 찾다 보면 두꺼비 상표의 소주 노래가 첫 번째였다는 주장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1920~1930년대에도 상품 광고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대 경우와 달리 녹음이 전하지 않아 오늘날 직접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인데, 아쉬운 대로 악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곡조를 확인할 수는 있다.
'민족 마케팅' 적극 이용한 경성방직
▲ <동아일보> 1936년 4월 30일자 태극성 광목 광고에 실린 <조선물산장려가>가사와 악보. |
ⓒ 동아일보사 |
그런데 광고에 사용된 이 노래는 사실 태극성 광목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10년 전부터 널리 불리고 있던 곡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 대중을 고무했던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1926년 가사 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조선물산장려가>가 바로 태극성 광목 광고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산에서 금이 나고 바다에 고기/ 들에서 쌀이 나고 면화도 난다/ 먹고 남고 입고 남고 쓰고도 남을/ 물건을 내어 주는 삼천리 강산/ 물건을 내어 주는 삼천리 강산
조선의 동무들아 이천만 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 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주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조선의 동무들아 이천만 민아/ 자작자급 정신을 잊지를 말고/ 네 힘껏 벌어라 이천만 민아/ 거기에 조선이 빛나리로다/ 거기에 조선이 빛나리로다" (<조선물산장려가> 가사. 곡조 듣기)
공모에서 당선된 가사는 당시 열다섯 살 학생이었던 윤석중이 지었는데, 뒷날 한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가가 된 바로 그 윤석중이다. 일반인들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곡조는 몇몇 전문가들이 각자 만든 작품 중에서 고르기로 했고, 논의 끝에 한국 최초의 피아니스트로도 잘 알려져 있는 김영환의 곡이 선정되었다.
▲ <조선일보> 1929년 6월 1일자에 실린 거북선 고무신 노래 현상공모 광고. |
ⓒ 이준희 |
▲ <조선일보> 1930년 8월 24일자 서울고무공사 광고에 실린 <거북선가> 악보와 가사. |
ⓒ 이준희 |
해가 바뀌어 1930년 8월에는 서울고무공사 신문 광고에 <거북선가>라는 노래 악보가 또 게재되었다. <거북선타령>과 가사는 같지만 곡조는 새롭게 만들어 붙인 두 번째 작품이었고, 작곡자는 한국 양악의 선구자로 <학도가> 등을 만든 김인식이었다.
"옛날에 옛날에 임진의 난리에/ 이순신 장군이 지으신 거북선/ 거룩한 거룩한 장군의 거북선/ 조선의 큰 자랑 세계의 첫 발명
삼백 년 긴 세월 지내인 오늘에/ 그 배의 후신이 고무신 되었나/ 이 신을 신고서 행진고 울리니/ 나도 이순인이 너도 이순신이
처음에 그 배는 널따란 바다를/ 육지와 같이도 다니고 있더니/ 지금에 이 신은 육지와 바다에/ 어느 곳 물론코 잘 돌아다니네" (<거북선가> 가사. 곡조 듣기)
더 앞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한국 광고음악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거북선가>는 전례도 없는 상황에서 그럼 어떻게 기획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명시적인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31년 이후 서울고무공사 이사로 재직한 기록이 확인되는 백명곤이 광고노래 기획을 제안하고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9년 당시에도 백명곤이 이사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사가 아니었다 해도 그는 서울고무공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서울고무공사 설립을 주도한 '백만장자' 재력가 백인기가 바로 백명곤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 1928년 1월 상하이 원정 경기 당시 백명곤의 모습(오른쪽). <동아일보> 1928년 2월 3일자. |
ⓒ 이준희 |
그와 동시에 백명곤의 이름은 각종 음악회에도 자주 등장했다. 만돌린·첼로·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했던 그는, 급기야 여러 차례 함께 무대에 올랐던 홍난파 등과 더불어 1928년 코리안재즈밴드를 결성하기까지 했다. 그해 연초 축구 경기를 위해 갔던 상하이에서 다양한 악기를 사 가지고 온 것이 밴드 결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코리안재즈밴드는 음반을 녹음하진 않았지만 공연과 방송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에 쓰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금 5만 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자살을 시도하고, 집으로 기생들을 불러 술판을 벌이다가 한 명에게 맥주병을 던져 이를 부러뜨리는 등,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한량 백명곤에게는 구설도 많았다.
▲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코리안재즈밴드의 모습. 맨 오른쪽이 백명곤. |
ⓒ 이준희 |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성방직 설립자 김성수는 이른바 친일 문제로 논란이 가장 많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경제·교육·언론·정치 등 많은 분야에서 크고 깊은 발자취를 남겼지만,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는 언행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해 김성수의 자발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옹호도 적지 않으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의 이면을 달리 해석하고자 한다면 태극성 광목 광고에도 부정적으로 볼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아닌 말로 '민족팔이'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거북선 고무신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처지가 어려운 고학생들에게 안정적인 생활 여건을 제공한다는 것이 서울고무공사 설립 취지이기도 했으나, 백명곤의 아버지 백인기 또한 친일적 행동을 마다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친일 명단에 오른 인물이 설립한 회사에서 일본 침략에 맞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광고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복잡다단한 한국 근대사의 아이러니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시대의 빛과 그늘이 교차하고 그에 대한 후대 평가가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리는 모습은, 가볍게 흘려듣기 마련인 시엠송과 별 관련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주제는 사소해 보이는 그런 일상사에도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피륙과 신발에도 당연히 역사는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당신도 쓰레기시멘트로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충격적 통계
- 전례 없이 위태로운 독도... 일본 뜻 따라 움직이는 윤 정부
- '조선' 보도 인용해 물타기 나선 국힘 "전직 양평군수 조사해야"
- '윤석열 라인' 검사 출신 장관들, 왜 자꾸 자리를 걸까
- 충격 영상... 이주노동자 집단폭행 10대들, 사건의 전말
- 조국 딸 소송취하 3일만에 아들도 연세대 석사학위 반납
- "27주 6일 쌍둥이가 나온대"...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 민주당이 종점변경 논의? 당시 양평군수 인터뷰 다시 보니...
- 국힘, 민주당-IAEA 간담회 두고 '국제적 망신' 맹비난
- [오마이포토2023] 야당 의원 182인, 이상민 탄핵심판 최종의견서 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