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장마전선 이상 있다
“계속해서 비는 내렸다. (…) 세상이 온통 물바다요 수렁 속이었다. (…) 하도 빗소리 천지여서 심지어는 아버지가 뀌는 방귀마저도 그놈의 빗소리로 들릴 지경이라는 객쩍은 농담 끝에 어머니가 딱 한 차례 웃는 걸 본 적이 있다.”
윤흥길의 중편소설 『장마』의 한 대목이다. 한 달 넘게 쏟아지는 비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면서도 익살스럽다. 1973년 발표했으니 올해로 딱 50년이 됐다. 얼마나 장마가 지긋지긋했으면 ‘두려움의 결정체’ ‘악의에 찬 빗줄기’에 비유했을까. 소설의 배경이 6·25 무렵 남녘의 외딴 마을이니 굳이 따져보면 70년 전의 여름 풍경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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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흥길 중편소설 『장마』 발표 50년
기상이변 속 ‘장마’ 용어는 사라질듯
정치권에 낀 먹장구름은 되레 짙어져
」
한데 그런 장마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폭염과 폭우가 하루에도 수시로 자리바꿈하는 게릴라성 날씨가 낯설지 않다. 시시각각 심술부리는 요즘의 하늘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요즘의 구름이다. 크게 보면 모든 게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이변 탓이다. 이에 기상청은 장마라는 용어를 앞으로 쓰지 않을 방침이다. 여름철에 여러 날 계속해서 내리는 비(장마)는 유효기간이 끝나간다는 판단에서다. 기상 여건은 갈수록 들쭉날쭉하는데, 국어사전 말뜻만 붙잡고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
기상청이 지난해 발간한 『장마백서 2022』를 대략 훑어봤다. 최근 20년 동안 시간당 30㎜ 이상의 여름철 집중호우가 그전 10년(1980~90)보다 20% 넘게 증가했다. 반면에 1950년대 이후 꾸준히 늘어나던 장마철 강수량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하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장마철 폭우는 증가한 반면 강우량 자체는 감소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장마에도 양극화 현상이 심해졌다는 점이다. 지난 40년간 지역별 장마 기간을 보니 2020년 중부에서 최장 53일, 2018년 남부에서 최단 13일을 기록했다. 이래저래 사회도, 날씨도 종잡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다.
다시 소설 『장마』 얘기다. 윤흥길 작가는 각각 국군 소위와 빨치산 아들을 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대립 구도 속에 6·25 이념전쟁의 비극을 짚고 남북화해에 대한 희원을 담았다. 소설은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라는 짤막한 문장으로 끝난다. 철천지원수처럼 지내던 두 할머니가 서로를 받아들이며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신’ 장마도 그친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이다. 현실 속의 장마전선은 예나 지금이나 가실 줄을 모른다. 정전 70년을 맞은 남북관계는 먹장구름만 짙어지고, 우리 사회 곳곳에도 궂은비만 잦아지고 있다. 기상학적 장마는 머잖아 사라진다는데 정치판의 매우(梅雨)는 더욱 난폭해지는 형국이다. 무슨 부침개도 아닌데 이미 결정된 고속도로(서울~양평) 건설을 야당발 ‘가짜뉴스’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뒤집은 게 대표적인 경우다. 요령부득의 정책이다. 여권의 반박대로 가짜요, 선동이라면 그 실체를 당당하게 밝히면 되지 않나. 판단은 유권자의 몫이다. 여권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호기도 될 수 있다.
기상청 분석에 따르면 지난달 한반도 일대에 발생한 낙뢰는 총 2만1596회, 최근 10년간 6월 평균 횟수(1만997회)의 2배에 가까웠다. 대기가 불안정해진 까닭이다. 날씨 탓일까. 설마 그렇진 않겠지만 요즘 통치권도 번쩍번쩍, 국정에 번개 페달을 단 느낌이다. 수능시험 개편부터 KBS 수신료 분리징수까지 속도전을 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마디에 태풍급 힘이 실린다. ‘반국가세력’ ‘북한 지원부’ ‘이권 카르텔’ 등 윤 대통령의 공격성 발언도 시대의 조급증을 보여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서두를수록 일을 그르치기 쉽다. 각종 이해집단이 칡넝쿨처럼 얽힌 국정은 더욱 그렇다. 지난해 봄 방영된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시우다. 시우(時雨)는 시기에 잘 맞게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도 사나운 폭우가 아닌 촉촉한 시우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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