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P 미끼에 7000만원 날렸다…구직여성 노리는 '교묘한 사기'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서민 피해 잇따르는 악질 사기 기승
충북 청주에 사는 전직 교사 ‘제피/7000만원님’의 비극은 지난 5월 26일 오전 11시 14분 한 통의 문자를 받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주문서 작성’ 아르바이트 모집이었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기간제 수학 교사 일을 그만둔 그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다는 안내에 마음이 끌렸다. 기업체에 다니는 남편 월급을 쪼개 아이들을 위한 적금도 꾸준히 불입해온 그였다.
회사 관계자는 쇼핑몰 앱에서 상품의 주문서를 작성하면 상품값의 5~20%를 지급한다고 설명했다. “모든 거래는 포인트로 진행된다”며 구매 체험용으로 20만 포인트를 지급했다.
회사 측은 “지원금을 다 썼는데 계속 주문을 올려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1만8842원을 버셨으니 출금해보시라”고 했다. 실제로 돈이 들어왔다. 회사를 믿게 된 ‘제피/7000만원님’은 회사 지시대로 자기 돈 50만원을 포인트로 충전했다. 그러자 회사가 이번엔 9만3290원짜리 ‘반려동물 원형 자동급식기’(해외 직구)와 10만9220원짜리 ‘반려동물 접이 유모차’를 경기도 화성의 물류센터로 주문하는 업무를 맡겼다. 역시 수익금 포인트가 지급됐다.
다른 사람 걱정하는 마음 악용
포인트 출금에 경계심이 풀어질 즈음 회사 측은 ‘공동구매’ 참여를 제안했다. 금액이 많고 수익금도 많은데 ‘제피/7000만원님’이 잘해서 기회를 준다고 했다. 수락하자 라인 메신저를 설치하게 한 뒤 공동구매 방으로 초대했다. 세 명이 있었다. '강아름·Park님'이 들어와 있고 팀장인 '김은진님'이 잠시 뒤 '임아진님'을 추가했다. “저는 두 번째예요” “팀장님 오늘 수익 좋은 거로 부탁드려요!!”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아름님은 또 보네요?” “ㅎㅎ 왜요 저 보기 싫으세요?” 같은 동참자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팀장은 ▶타인 명의도용 발견 시 즉시 회원자격 박탈 ▶실수로 인한 구매는 수익금 지급 불가 같은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거기엔 ▶중도하차 불가 ▶단 한 명이라도 미션 미완료시 전체 팀원 미션 취소 같은 함정이 포함됐지만 ‘제피/7000만원님’은 눈치채지 못했다.
팀 미션 첫 상품은 83만1530원짜리 UHD TV였다. 판매수익도 15%(12만4730원)로 뛰었다. 참여자들이 똑같이 돈을 내 충전해야 하는데, '임아진님'이 “급하게 오느라 충전을 못 했다”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ㅜㅜ”라는 메시지를 썼다. ‘제피/7000님’도 추가 충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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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 트렌드 노린 리뷰-공동구매-3자구매 사기에 수천만원 뜯겨
결혼·육아로 경력 단절된 여성이 타깃…중국인 연루 의혹 드러나
민간에 SOS 청하는 실정…사기근절특위 “범정부 통합 솔루션 필요”
」
여러 명이 주부 한명 공략
모두 미션을 끝냈다며 QLED TV 167만4000원짜리 2개를 주문하는 게 다음 미션으로 떨어졌다. 다음엔 731만9700원짜리 컴퓨터 등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4663만8000원까지 나왔다.
그 사이 ‘제피/7000님’은 두 자녀를 위해 든 적금을 깨고 난생처음 카드빚을 냈다. 간혹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같은 팀의 네 명은 “저 외근 나와 있으니 기다려 주세요” “팀장님 아직 안 오셨나요”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얘기해 의심을 가라앉혔다. 그 중 한명이 팀 미션을 주저하는 말을 하자 다른 사람이 “여러분 믿고 한 거예요”라고 따지듯 말한다.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나 때문에 돈을 못 번다’는 미안함이 들었다.
액수가 커 주저할 때 '임아진님'이 개인 채팅을 해왔다. “아기도 한쪽으로 봐야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면서 “저도 처음 팀 미션할 때 무서웠는데 바로 입금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팀 동료의 설명에 경계심이 풀렸다.
이렇게 7000만원을 보내고 나서야 사기임을 깨달았다. 대화방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경찰서와 은행에 신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비슷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오픈 채팅방을 알게 돼 들어갔다. 취재 중인 기자에게도 알려줘 채팅방에 합류했다.
같은 피해 채팅방에만 79명
이 채팅방에만 9일 낮 12시 기준으로 79명이 있다. ‘부업사기’ 피해자들이다.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대화명을 ‘닉네임/피해 금액’으로 한다. ‘제피/7000만원님’을 속인 네 명에게 똑같이 당한 피해자도 있다.
기자와 대화한 피해자는 전부 여성이다.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된 상태에서 하루 몇만 원이라도 벌려다가 궁지에 몰렸다.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피해가 더 커졌다. ‘돌아와/4천만원님’은 육아 휴직 중인 30대 주부다. ‘도비비/80만원님’처럼 취업을 준비 중인 20대 여성들도 있다. 한 여성은 “자살하고 싶었지만 아이 때문에 못했다”고 말했다.
채팅방 한 곳의 피해가 이 정도니 사기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전국 경찰서에 신고가 쏟아지는 상황이다. 새로운 수법 중엔 ‘제삼자 사기’도 교활하다. 대형 포털사에서 제공하는 개인 쇼핑몰과 똑같은 페이지를 만들고 계좌번호와 사업자 번호도 그대로 복제한 뒤 동일한 물건을 전시한다. 짝퉁 사이트를 방문한 고객이 구매 계약을 체결하면, 짝퉁 사이트를 만든 사기꾼은 진짜 사이트에 구매 계약을 하면서 자기 주소를 적는다. 고객의 돈은 진짜 사이트 계좌로 송금되지만, 사기꾼이 물품을 가로채거나 환불받는 수법이다. 물건을 못 받은 고객은 진짜 사이트를 고발해 운영자가 사기범 누명을 쓴다. 사기범들은 프로필에 가족이나 반려견 사진을 올려 선한 인상을 준다.
구매자-판매자 양측 울리는 사기
대형 포털이 만든 몰에 사기꾼이 입점해 파격 할인 프로모션을 올리고 돈을 가로채는 사례도 잇따른다. 210만 원짜리 건조기를 전시상품 특별판매라며 63만원에 올리고 교묘한 수법으로 돈만 가로챈다.
문제는 피해자가 경찰서와 은행에 신고해도 사기 계좌 정지 등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기 문자를 발송한 번호로 전화를 해봤다. 한 남성이 받는다. 그는 “한 달 전쯤 속아서 사채 앱을 깔았다가 전화를 도용당한 것”이라며 “피해자들 전화가 계속 와서 빨리 경찰 조사라도 받고 싶은데 아무 연락이 없다”고 말했다.
전민성 대한변호사협회 제2정책이사는 “보이스피싱처럼 범죄 유형이 정형화하면 즉시 지급정지 조치를 할 수 있겠지만, 신종범죄인 데다 정상 영업 계좌인지가 불분명하다면 조치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 이사는 “수사기관이 기존 수법을 파악하자 새로운 수법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부 피해자가 사기범과 통화해 녹음한 내용을 들어보면, 여성적인 대화명과 달리 중국 동포 말투의 남성이다. 돈을 받고 싶으면 대포통장을 개설하라던 한 남성은 자신이 중국 교포며, 본거지는 필리핀 마닐라라고 밝혔다.
민간에 도움 청하는 피해자
경찰과 은행에서 신속한 도움을 못 받은 피해자들은 민간 전문가들을 찾아간다. 금융감독원 국장 때 ‘그놈 목소리’를 공개했던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 이사장, 사기범 계좌와 전화번호를 검증하는 ‘더치트’의 김화랑 대표, 대출 사기 피해를 구제하는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 등이 대표적이다. 더치트는 사기범을 다양한 기법으로 압박해 상당수 환불조치를 끌어냈다. 이 소장은 사채업자의 불법성을 파고들어 협박성 추심을 중단시킨다.
정부도 국민통합위원회(위원장 김한길) 산하 민생사기 근절 특별위원회를 출범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정재 특위 위원장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 근절이야말로 복지국가로 가는 첫걸음이자 민생정부의 책무”라며 “경찰 등 부처별로 수백 차례 대책을 내놨지만 진화하는 사기엔 역부족이어서 범정부 통합 솔루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컨트롤 타워 만드니 피해금 8배 회수”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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