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시 국회 불러놓고 민주당 호통·시위·욕설
더불어민주당 일부 권리당원과 야권 성향 유튜버들이 9일 민주당 초청으로 국회를 방문한 라파엘 그로시(사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향해 면담장 밖에서 “그로시, 고 홈(Go Home)”을 외치며 거세게 항의 시위를 벌였다. 면담장 안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염수 방류에 반대해 단식농성 중인 우원식 의원은 그로시 총장 면전에서 “셀프 검증, 일본 맞춤형 조사”라며 “일본에 음용수로 마시라고 하라”고 맹비난했다.
지난 7일부터 방한한 그로시 사무총장은 이날 민주당 후쿠시마 원전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대책위원회(이하 오염수대책위)의 초청으로 국회 민주당 원내대표실을 방문해 1시간30분 동안 야당 의원들과 면담했다.
그로시 사무총장이 먼저 모두발언을 통해 IAEA 보고서에 대해 “(일본의 후쿠시마 방류 계획이) 국제 안전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태스크포스(TF)팀에는 한국 등 10여 개국에서 온 과학자가 참여했다”며 “굉장히 충실하게 업무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러분들의 염려를 이해하고 있으며, 특히 계획 실천에 대한 우려도 안다”며 “그래서 IAEA는 일본 정부에 방류 계획이 잘 지켜지는지 완전히 검토하기 위해 수십 년간 일본에 상주하겠다고 제안했고, 지난주 (모니터링을 위한) IAEA 사무소를 후쿠시마에 개설했다”고 밝혔다.
16분간에 걸친 그로시 총장의 모두발언이 끝나자, 민주당 측은 두 배 이상인 35분가량 IAEA를 성토했다. 위성곤 민주당 오염수대책위원장은 “IAEA를 존중하지만, 최종 보고서의 부실함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는 “IAEA는 다핵종제거설비(ALPS) 검증을 안 했다”며 “후쿠시마 오염수는 사고 원전에서 나온 핵 폐수이기 때문에 사실상 핵폐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우원식 의원도 IAEA 보고서에 대해 “처음부터 중립성과 객관성을 상실한 일본 편향적 검증”이라고 주장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중단을 요구하며 14일째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우 의원은 “IAEA 입장은 일관되게 ‘해양 방류 지지’였다”며 “주변국 영향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미리 결론 내린 것은 ‘셀프 검증’이자 ‘일본 맞춤형’ 조사”라고 주장했다.
국회 면담장 밖 노재팬 티셔츠, 욕설 시위…여당 “국제 망신”
특히 그가 그로시 총장이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오염수를 마실 수 있다’고 말한 것을 거론하며 “안전하다고 확신하면 일본이 음용수로 마시든지 공업·농업 용수로 쓰라고 권고할 의사가 없는지 묻고 싶다”고 맹비난하자 그로시 총장이 메모를 중단하고 우 의원을 응시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이 외에도 의원들의 거센 비판에 의자에 등을 대고, 안경을 벗거나 중간중간 한숨도 내뱉는 모습도 보였다.
그로시 총장, 면담 중간중간 한숨
그로시 총장은 전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야당 설득 계획에 관한 질문에 “IAEA가 특정한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를 설명할 계획이며 야당 역시 의구심을 보일 수 있고 의제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야당 역시 집권을 원하고 있으며, 그때는 야당 또한 IAEA를 스스로 상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한 바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IAEA의 중요한 회원국이다. 야당 역시 IAEA가 굉장히 중요한 기구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그의 합리적 기대가 통하지 않았던 셈이다.
이후 비공개로 30분간 이뤄진 면담에서도 양측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민주당은 IAEA에 ▶해양 방류 외의 오염수 처리 대안 검토 ▶해양 방류 일정 연기 등을 제안한 데 대해 IAEA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다만 민주당 측이 “세계보건기구(WHO)나 국제해사기구(IMO), 유엔 인권이사회(UNHRC) 등 다른 국제기구와 공동으로 오염수 방류가 해양생태계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하자”고 한 데 대해, IAEA는 “필요성에 공감한다.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면담장인 국회 본청 민주당 원내대표실 창문 밖에선 친(親)민주당 성향 유튜버와 권리당원들이 모여들어 고성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외친 “그로시, 고 홈” 구호가 회의장 안까지 울려 퍼질 정도였다. ‘노 재팬(No Japa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한 여성은 “부끄러운 줄 알아 × 자식아”라고 외쳤고, ‘이재명과 나는 동지다’라는 스티커를 촬영 장비에 붙인 유튜버도 “이 ××야, 일본에 돈 얼마나 처먹었냐” 같은 욕설을 했다. 시위대 일부는 우원식 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노원을 지역위원회’ 명의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국회의사당 경내 집회·시위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1조에 의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면담 이후까지 시위가 계속되자 그로시 총장 일행은 국회 본청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그로시 총장은 자신을 겨냥한 시위에 대해 비공개 면담에서 “한국 국민의 우려나 반대 의사가 있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으며, 민주적 사회에서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의견이라고 이해한다”고 언급했다고 민주당 측은 전했다.
그로시 총장은 민주당과의 면담 이후 2박3일 방한 일정을 마치고 뉴질랜드를 향해 출국했다. 그는 출국 직전 트위터에 민주당 대책위와의 면담 사진을 올리며 “IAEA는 한국 국민의 우려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 방류와 관련한 투명성과 열린 대화는 우리의 우선 과제”라고 적었다.
국민의힘은 이날 민주당이 그로시 총장과 만나 IAEA를 성토한 데 대해 “국제기구의 과학적 검증 결과에 무턱대고 홀로 딴지를 걸고 있는 민주당이 세계적 시각에선 미개해 보일 것”(김민수 대변인)이라고 비판했다. 김 대변인은 특히 이날 면담 중 고성 시위가 계속된 데 대해서도 “한국을 찾은 외교 사절에 대한 결례이자 국제적인 망신”이라고도 지적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지난 7일 밤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도 “그로시 고 홈”을 외치는 시위대와 마주쳐 2시간 넘게 발이 묶인 뒤 8일 새벽 0시50분에야 화물청사 통로로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정의당 부대표, 시위 중 체포됐다 귀가
이날 공항에선 항의 시위를 벌이던 이현정 정의당 부대표가 경찰의 얼굴을 가격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서울 강서경찰서에 따르면 이 부대표는 7일 오후 11시쯤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서 그로시 총장의 방한을 규탄하는 시위 도중, 손팻말을 펼치려다 경찰관의 얼굴을 가격해 안경을 파손했다. 이에 경찰은 이 부대표를 공무집행방해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했다가 신원을 확인한 뒤 귀가 조치했다.
정의당은 “이 부대표가 항의 메시지를 담은 플래카드를 펼치려 애썼으나 경찰이 무리하게 제지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라며 “공당 부대표의 항의마저 제지하고 막아서는 경찰의 태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8일 그로시 총장이 묵는 호텔 주변에 일부 단체가 유튜브 방송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그로시 총장은 이런 상황에 대해 중앙일보에 “솔직히 좋지는 않았다”면서도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선 당연히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고, 나는 (논쟁에) 숨거나 이견을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오현석·박현주·김정재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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