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제정 뒤에도 여순사건에 어른거리는 몹쓸 그림자

서부원 2023. 7. 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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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산 현충공원에 더부살이하는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탑

[서부원 기자]

 순천 동천변에 조성된 여순 사건 평화 공원의 모습. 원래 이름은 장대공원이었는데, 이곳에서 여수에서 올라온 14연대 봉기군과 방어하는 순천 경찰이 총격전이 벌어졌기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 서부원
 
올해만도 여남은 차례, 주말 짬 날 때마다 찾았는데 그곳엔 늘 아무도 없었다. 이태 전 '여순 사건 특별법'이 제정, 시행되던 때 잠깐, 그리고 올해 말까지 희생자와 유족 신고 기간을 연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된 올 초 잠깐 북적이더니 다시 인적이 끊겼다. 여순 사건 관련 사적지 주변은 무더운 여름 바람조차 서늘함이 감돌았다.

사람 대신 특별법 제정과 시행령 통과를 경축하는 빛바랜 현수막만 펄럭인다. 거기엔 어김없이 특정 정당과 정치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언뜻 극우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보수 정당과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홍보용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늘 그래왔듯, 법 제정을 요구해온 숱한 시민들의 땀과 눈물은 의정 활동 성과로 귀결되며 그들의 독차지가 된다.

특별법의 제정은 '이제 여순 사건에 대해 속 터놓고 말해도 좋다'는 뜻일 테다. 국가가 해코지 안 할 테니, 겪은 대로 본 대로 사실을 고백하라는 거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진심'을 의심하는 희생자와 유족들은 지난 70여 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좀처럼 입 밖으로 내려 하지 않는다. 그만큼 국가로부터 입은 상처와 고통이 크고도 깊기 때문이다.

사망자만 최소 1만 1천여 명... 대부분 민간이었다
 
 여순 사건 당시 봉기군과 토벌군의 첫 전투 현장인 여수 인구부 전투지 모습. 찾는 이도 없고, 안내 팻말 앞에 차량이 세워져 있어 접근조차 어렵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아쉽다.
ⓒ 서부원
 
작년 이맘때쯤 먼 친인척 중에 여순 사건 당시 좌익으로 몰려 피신한 뒤 행방불명된 이가 있어 유족을 부러 찾아가 특별법의 취지를 설명하고 신고를 권유한 적이 있다. 팔순의 유족은 일언지하 거절했고, 더는 여순 사건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죽임을 당하는 꼴을 봤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가 말한 '세상'은 '권력'을 의미한다. 당시 봉기군과 토벌군이 차례로 도시를 장악하면서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애먼 민중들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그는 14연대 봉기군에 의해 처형당한 친일 지주들과 경찰을 여럿 봤고, 토벌군에 의해 부역자로 몰려 참혹하게 희생된 뒤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는 숱한 주검들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사망자만 최소 1만 1천여 명(당시 전라남도 당국 통계)에 이르는 희생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봉기군과 토벌군 사이의 교전 중 사망한 이들은 많지 않았고, 사건이 진압된 후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토벌군이 학살한 경우가 대다수였다는 건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일부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2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며, 당시의 토벌군은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전장에 투입됐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그들은 '공산 괴뢰 집단'의 야욕을 막아낸 '애국자'로 칭송받게 됐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여순 사건의 희생자들은 반국가세력, 곧 '빨갱이'로 규정됐다. '빨갱이'여서 죽인 게 아니라, '애국자'가 죽였으므로 그들은 '빨갱이'가 되어야만 했던 거다.

여순 사건의 부역자 색출이 마무리되던 그해 12월 1일,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을 본뜬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반공'은 우리 사회의 '국민 윤리'이자 행동 지침이 됐다. '빨갱이'로 낙인찍힌 여순 사건의 유족들은 서슬 퍼런 연좌제의 굴레 속에 출세의 욕망을 접어야 했다. '신원조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헌법상 기본권인 공무담임권조차 제한됐다.

70여 년 동안 연좌제의 고통 속에 침묵을 강요받은 그들이 고작 특별법 하나로 단숨에 닫힌 입이 열리기를 기대할 순 없다. 그들의 입만 쳐다보며 지금껏 지연된 진상규명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단언하건대, 그들의 희생을 몰라서, 그들이 말하지 않아서 여순 사건이 묻힌 게 아니다. 국가가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람들의 기억을 왜곡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에게 보내는 후손들의 '변명'이자 '반성문'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비 앞에 누군가 손글씨로 더 공부하고 알리겠다는 다짐을 써넣은 조약돌이 올려져 있었다.
ⓒ 서부원
 
'우린 너무 몰랐다.' 여순 사건 관련 사적지의 안내판에 새겨진 글귀다. 이는 희생당한 유족들에게 보내는 후손들의 '변명'이자 '반성문'이다. 참혹한 역사의 기억을 왜곡시키려는 국가에 맞서 '뒤늦게나마 깨달은' 시민들이 다짐하며 새겨놓은 묵직한 그 글귀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국가가 가해자라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대면하는 것으로부터 성찰은 시작된다.

교과서에 등재된 여순 사건의 공식 명칭은 '여수 순천 10.19 사건'이다. 여수 순천 지역을 중심으로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이다. 이 명명만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놀랄 만한 변화인 건 맞다. 지금까지도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10.19 사건'이라고만 하면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고, 줄여서 '여순 사건'이라고 하면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교정해주는 황당한 경우마저 겪는다.

당시를 증언할 유족들마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70여 년의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국가가 피해를 배상해준다 한들, 수혜자를 찾기도 힘든 상황이다. 진상이 규명돼도 단죄할 학살 책임자도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수 정권이 줄곧 반대해오던 특별법 제정에 흔쾌히 찬성표를 던진 것도 그래서일 테다.

진상규명은 책임자 처벌과 피해 배상을 전제로 한다. 국가가 가해자인 사건의 경우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여순 사건은 두 단계를 뛰어넘어 진상규명이 역사의 영역으로 넘어와 버렸다. 마치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됐으며, 관련 사적지를 정비하고 향후 추모 행사를 국가가 주관하는 것으로 퉁치자는 식이다.

멀게는 5.18 민주화운동이 그랬고,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가 그랬다. 국가가 가해자인 사건의 경우, 국가는 진상규명에 늘 비협조적이었다. 핵심 자료들을 감추거나 파기했고, 관련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들키면 마지못해 찔끔 사과하는 게 전가의 보도였다. 세월이 흐른 뒤엔 어김없이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며 부박한 여론을 선동해댔다.

여순 사건 사적지를 찾을 때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국가가 나 몰라라 할 때 참담한 역사를 기억해내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건 늘 지역사회와 시민의 몫이었다. 현장에 팻말을 세워 사적지임을 알리는 일부터 각종 행사를 열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까지 그들의 헌신에 빚지고 있다. 국가의 집요한 방해도 그들의 노력을 꺾을 순 없다.

여순 사건 안내 팻말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
 
 구례의 봉성산 현충공원 모습. 맨 위에 횃불 모양의 현충탑과 진격하는 모습의 국군 동상이 자리하고, 오르는 계단 옆에 여순 사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희생자 위령탑은 사진 오른쪽 안내판 옆에 있다.
ⓒ 서부원
 
매번 여순 사건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지리산 자락인 구례의 '봉성산 현충공원'이다. 여순 사건이 여수, 순천 지역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여순 사건을 바라보는 국가의 시각을 보여주는 곳이어서다. 현충공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6.25 한국전쟁 전후 북한 공산군과 싸우다 전사한 국군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곳엔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탑도 함께 있다. 공원 맨 윗자리에 세워진 현충탑과 국군 동상 아래 계단 옆으로 '6.25 참전용사 추모탑'과 마주한 채 세워져 있다. 위치만 보면, 국군 동상을 왕처럼 모시고 있는 신하의 자리다. 원래 위령탑은 구례읍 서시천 체육공원에 있었는데, 공원을 정비하면서 지난 2013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얄궂은 건, 공원이 조성된 봉성산은 여순 사건 당시 국군의 손에 민간인이 학살되고 암매장된 곳이라는 점이다. 지난 2007년 유족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12구의 유해가 발굴되기도 했다. 애초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어야 마땅한 곳이다. 그런데도 생뚱맞게 횃불 형상의 현충탑과 총을 들고 전진하는 국군들의 동상이 공원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건 당혹스럽다.

거칠게 말해서, 학살한 자들이 학살당한 이들과 나란히 위령되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학살이 벌어진 현장에서 가해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것 같아 더욱 황당하다. 민간인 희생자들을 위령하려면 국군의 승낙이 필요하다고 을러대는 듯해 민망하기까지 하다. 와중에 시민들이 현충탑 오르는 계단 옆에 세워놓은 여순 사건 안내 팻말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돌아오는 길, 정부가 국립묘지에 묻힌 친일파들의 친일 행적 기록을 지울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친일파들의 묘가 독립운동가들을 발아래에 둔 국립묘지의 현실과 방금 답사한 '봉성산 현충공원'의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졌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는 마당에,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탑이 현충공원에 더부살이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순 사건의 대표적 사적지인 여수 만성리 형제묘의 제단에 참배객이 자필로 추모사를 적은 책을 한 권 올려두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에 글씨도 번지고 책도 흠뻑 젖어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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