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소나무마저 예를 갖추는 광주 박산마을

임영열 2023. 7. 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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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에 걸쳐 9명의 충·효·열을 기리는 '양씨삼강문' 이야기

[임영열 기자]

 소나무마저 낮게 엎드려 예를 갖추는 곳 양씨삼강문.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다
ⓒ 임영열
광주 사람들 중에서 포충사, 충장사, 충민사, 경열사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광주의 3충신'과 고려말 명장을 모신 사당이다.

광주광역시 '4대 사우(祠宇)'로 지정되어 있어 봄·가을 학생들의 소풍장소와 유치원 원아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인기가 있는 곳이라서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웬만한 시민들은 이곳에서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3대 이어 탄생한 충신·효자·열녀 기리는 곳

광주 광산구에는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 관계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역사적 가치로 보면 4대 사우에 버금가는 문화유산이 한 곳 있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발원한 황룡강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운지구의 아파트 단지와 호남대학교 앞을 교교히 흐른다.
  
 박산마을 전경
ⓒ 임영열
 
역사의 강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광주 시민들이 물놀이를 즐겼던 송산유원지가 있다. 추억의 오리배들은 간 곳 없고 지금은 파크골프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물줄기를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전원 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으로 누런 황룡이 살았다는 전설의 강이 흐르고 뒤로는 물고기 등을 닮았다는 '어등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를 취하고 있다.

이곳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박산(博山) 마을'이다. 전해지기를 마치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갈용음수(渴龍飮水)' 형상으로 명당 중의 명당 마을이라고 한다. 대대로 죽산 박씨의 터전으로 '박씨들의 산'이라는 뜻으로 '박산(朴山)' 마을이었는데 뒤에 '박산(博山) 마을'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콩떡담장에 둘러 싸여있는 양씨삼강문
ⓒ 임영열
   
마을 어귀 나지막한 언덕에 마치 수호신처럼 서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 아래 키 낯은 기와집 한 채가 아름다운 콩떡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치 소나무 두 그루가 낮게 엎드려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이다. 어떤 곳일까. 앞서 말한 4대 사우에 비해 다소 외딴곳에 자리한 관계로 고개를 갸웃하는 시민들이 많을 성싶다.

삼강문(三綱門)은 당시 충신·효자·열녀들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워준 정문(旌門)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마을 입구에 붉은색 문(門)을 세워 그 인물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포상하는 의미가 있다. 아울러 이를 '본받으라'는 교화와 장려의 뜻 또한 담겨 있었다.

이러한 정문은 신라시대부터 세워졌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들어서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아 탄생한 조선에서 '충과 효와 열'은 곧 500년 왕조를 지탱하는 '힘'이자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삼강문 입구 평삼문. 출입 시 허리를 구부리고 키를 낮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인방에 머리를 부딪치기 십상이다
ⓒ 임영열
   
 평삼문에 걸려있는 현판. 1803년 이헌중이 만들었다
ⓒ 임영열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제주 양씨 충민공 양산숙(忠愍公 梁山璹 1561~ 1593)과 그 문중 3대에 걸쳐 이어진 9명의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고 있다. 1635년(인조 13년)에 생원이었던 홍탁의 상소에 의해 목조로 세워진 '일문삼세구정려(一門三世九旌閭)'이다.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을 뜻한다.

낮게 드리운 평삼문에 이헌중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1칸 옆으로 길게 지어진 맞배지붕의 정려각과 마주한다. 여기서 주의 사항 하나. 사당이나 정려각 출입 시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키를 낮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인방에 머리를 부딪치기 십상이다. 신성한 곳이니 허리를 구부려 '예를 갖추고 출입하라'는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정면 외부에 '일문삼강 삼세구정려(一門三綱 三世九旌閭)'라는 현판과 중건기가 적혀 있다. 붉은 기둥과 기둥사이에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이 달려 있고 내부에 아홉 분의 정려가 걸려 있다.
 
 정려각.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 임영열
   
 정려각에 걸려있는 현판
ⓒ 임영열
   
이들은 모두 16세기 조선 8 문장 중 한 사람으로 광주목사와 경주 부윤,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송천 양응정(梁應鼎 1519~1581) 선생의 부인과 아들·딸·손녀·며느리들이다.

충신으로 모셔진 충민공 양산숙(梁山璹 1561~1593)은 이 마을에서 양응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천문·지리·병법에 능했다. "벼슬길에 나가지 말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과거를 포기하고 나주에 정사를 짓고 무술을 단련했다고 한다.

그가 31살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양산숙은 본인이 모은 3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참전한다. 전 수원 부사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장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부장을 맡는다. 형 양산룡과 동생 양산축을 군량을 조달하고 운반하는 운량장(運糧將)으로 임명한다.
  
 정려각 내부
ⓒ 임영열
   
 충신 양산숙의 정려
ⓒ 임영열
 
그해 7월 나주에서 출발해 경기도 수원까지 진격한 김천일 의병은 독성산성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며 승전보를 전한다. 이듬해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왜란 중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투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이 전투에서 양산숙은 김천일 장군과 최경회, 고종후와 함께 순국한다.

성이 함락되고 왜적들이 촉석루까지 올라오자 김천일 장군은 양산숙, 고종후, 최경회와 함께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때 양산숙이 "위태로운 처지에서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하고 주장(主將)으로 하여금 혼자만 죽음에 빠지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했던 말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효자 양산룡과 양산축은 호남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든 정유재란 때 무안 삼향포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니 죽산 박씨와 함께 바다에 투신해 순절했다. 양산숙의 처 광산 이씨는 당시 임신 중이던 손아래 동서 장흥고씨를 구하기 위해 왜구를 승달산으로 유인해 놓고 은장도로 자결했다.
  
 양산숙의 어머니이자 송천 양응정 선생의 부인 죽산 박씨의 정려
ⓒ 임영열
 
열녀로 봉해진 양산숙의 누이 제주 양씨는 어머니와 함께 순절했고 문화 현령을 지낸 임환에게 출가한 양산룡의 딸은 가족이 탄 배가 왜구들에게 막히자 배를 피신시키고 정작 자신은 바다에 투신해 순절했다.

이렇듯 '양씨삼강문'에는 임진왜란 7년의 전쟁 동안 제주 양씨 한 가문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가슴 아픈 사연과 그 가문이 남긴 충·효·열·절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다행히도 일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양산축의 처 장흥고씨에게 태어난 유복자가 가문의 대를 잇는다. 장흥고씨는 포충사에 모셔져 있는 고경명 장군의 손녀이자 진주성 전투에서 양산숙과 함께 순국한 고종후 의병장의 딸이다.

양산축과 장흥고씨의 아들 오재 양만용(1598~1651) 역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양씨 가문의 충의 정신은 구 한말까지 마을뒤 어등산을 의병의 본거지로 삼아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삼강문 옆에 있는 제주양씨 삼강전
ⓒ 임영열
 
왕대 밭에서 왕대 난다

그렇다면 이곳 박산마을 양씨 가문의 애국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양산숙의 할아버지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8~1545)이 누구던가. 기묘사화 때 화순 능주로 유배 왔다가 사약을 받은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준 '절의(節義)의 인물'이 아니던가.

고려말 충신의 대명사 포은 정몽주를 흠모하여 '포은을 배운다'라는 뜻으로 스스로 호를 '학포(學圃)'라 지었다. 호남 성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송흠(宋欽 1459~1547)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19살 때 운명의 친구, 조광조와 함께 나란히 생원시에 합격한다.

29살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3년 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사림들이 죽고 유배를 가거나 관직을 잃었다. 학포 또한 이때 삭직 당하고 화순 월곡으로 돌아와 보니 절친 정암 조광조가 화순 능성현에 유배와 관노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닌가. 둘은 매일 오가며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마을 입구에 송천 양응정 선생이 관직을 마치고 향리에 돌아와 세운 정자, 임유정을 복원해 놓았다. 원래 임유정 삼강문 뒤쪽에 있었다고 한다.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의 시문이 걸려있다
ⓒ 임영열
 
삭풍이 몰아치는 그해 12월 조정에서 정암에게 사약이 내려온다. 조광조는 절명시 한편을 남기고 학포와 영영 작별을 고한다. 학포는 장남 응기와 조카 양산보와 함께 정암의 싸늘한 시신을 거두어 60여 리 떨어진 쌍봉리에 묘를 쓰고 제사를 지낸다.

당시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것은 곧 죄인이 되는 일이었지만, 학포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이를 결행했다. 이 일로 장남 응기의 벼슬길은 막혔고 정암의 제자 양산보는 벼슬을 포기하고 담양으로 돌아와 '소쇄원'을 짓고 은거했다.

화순 한천면에 있는 '죽수서원'은 의리의 친구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을 배향하고 있다. 정암이 사약을 받던 그해 학포는 셋째 아들을 얻는다. 그가 양산숙의 아버지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1)이다.

송천은 33살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4년 뒤 병진 문과 중시에서 '남북제승대책'이라는 책문을 제시해 장원을 차지했다. 남북제승대책은 여진족과 왜구를 물리칠 국방 전략이었다. 이 대책은 훗날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의 근거가 되었고,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도 영향을 끼친다.
  
 박산마을 입구에는 의병마을 표지석이 있다
ⓒ 임영열
 
광주목사와 진주목사, 경주부윤을 지낸 후 성균관 대사성을 끝으로 관직생활을 끝내고 고향 박산마을로 돌아온 송천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문하에 문인으로는 송강 정철, 박광전,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이 있었다. 무인으로는 진주성 전투에서 둘째 아들 양산숙과 함께 순국한 최경회 장군과 신립 장군, 정운 장군 등 기라성 같은 충신들이 송천을 스승으로 삼았다.

살아생전 후손들에게 충과 효와 열을 엄하게 가르쳤던 송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1년 전 1581년 박산마을에서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산마을 인근 동호동 가족 묘역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영면하고 있다.

이렇듯 임진왜란부터 경술국치까지 이어지는 박산 마을 양씨 가문의 충·효·열·절의는 우연이 아니다. 왕대 밭에서 왕대가 나온다는 말이 허투루 생겨난 말이 아니다. 늙은 소나무마저 낮게 엎드려 예를 갖추고 있는 듯한 양씨삼강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민다.
      
 박산마을에서 멀지 않은 동호동에 양송천 일가의 묘역이 있다. 맨 위쪽이 송천 선생의 묘이고 맨 아래에 있는 묘가 충민공 양산숙과 정부인 광산 이 씨의 묘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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