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서 만난 선후배, 아직도 '친구'로 지내는 비결

정경아 2023. 7. 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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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아 기자]

▲ 옛 동료 모임 매달 또는 부정기적으로 모이는 옛 동료들과 뚜벅뚜벅 서울 역사 공부를 하고, 둘레길과 자락길을 걷고 수목원 피크닉을 다니며 퇴직 후 삶의 재미를 누리고 있습니다.
ⓒ 정경아
 
오전 10시 광화문 광장,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난다. 매달 모임을 주도하는 선배 부부를 포함해 여섯 명이다. 짱짱한 햇볕 아래 경희궁 경내를 걸어 언덕배기 쪽문을 통과한다. 서울시 교육청 길을 조금 걸으면 홍난파 가옥이다. '고향의 봄'과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로 시작하는 동요를 작곡한 홍난파 선생(1898-1941)이 살던 붉은 벽돌 건물. 담쟁이 넝쿨과 잘 어울린다.

현재 관리를 맡고 있는 홍 선생의 외손자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가 들려주는 난파 선생의 삶에 20세기 초 우리 근대사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홍난파 가옥을 나와 3분 걸으면 바로 '딜쿠샤.' 1923년에 지어진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2층 벽돌집으로 오랜 우여곡절을 거쳐 거의 완벽하게 복원됐다. 집의 이름인 딜큐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란 뜻이라나. 1920년대 국내 서양식 집의 건축 기법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요즘 부쩍 유명세를 타고 있다.

테일러씨가 한국에 처음 온 건 1897년. 평안북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가진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는 광산 관리자로 일하는 한편 1919년 3.1운동을 해외 언론 AP에 타전한 최초의 외신 통신원으로도 활동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과 독립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방당한 후에도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딜쿠샤는 현재 서울시 문화재 신분, 무료 개방 중이다.

일행은 근처 돈의문박물관 마을로 향한다.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감성이 충만한 마을 박물관이랄까. 옛 모습을 간직한 골목길 안에 이발소와 영화관, 그리고 학교 앞 분식집이 재현돼 깨알 재미가 가득하다.

부근에 있는 중국집에 자리를 잡는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 끝난 시간대라 여유롭게 이과두주를 주문한다. 군만두와 짜장면이 술술 넘어간다. 오늘의 일정을 복기한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를 돕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외국인들의 활약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말에 다들 공감! 말 나온 김에 다음 모임은 양화진 외국인 묘역을 찾아가기로 한다. 1/N로 나눈 점심과 커피 값은 2만 원에서 3만 원 정도. 오후 3시가 넘어 헤어진다. 모두들 웃는 얼굴이다.

학교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우리는 만났다. 엄밀하게 말하면 선후배 사이지만 퇴직한 후엔 모두 옛 동료다. 누구에게나 첫 직장은 첫사랑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시절의 내 열정과 상처를 지켜봤던 그들과의 인연이 어찌 사소한 것이겠나. 옛 상사들과의 갈등, 조직 내 부조리에 저항했던 공동의 기억은 우리를 꽁꽁 묶어준 동아줄. 그 시절의 연대가 평생동지회로 발전하고 있는 건가.

물론 직장을 떠난 시기는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모여 앉기만 하면 정치 현실을 토론하고 읽은 책 이야기를 한다. 유튜브 채널이나 OTT 영화 정보를 나누고 추천한다. 자전거 라이더인 후배는 자전거를 끌고 일본에 다녀온 여행기를 들려준다. 또 다른 후배의 베트남 오지 트레킹에 질문이 쏟아진다. 가족의 근황을 업데이트하며 손주 자랑도 한다.

내게 직장 인연으로 시작된 모임은 일곱 개 정도다. 일을 매개로 알게 돼 연락이 이어지는 동종 업계 종사자들과의 모임도 두어 개 있다. 정기적이라기보다는 부정기적으로 만나는 경우가 많아 느슨한 형태다.

두 번째 직장에서 만난 후배 하나는 퇴직 후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로 이사 왔다. 그녀는 내게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시작된 '시네 도슨트' 강좌를 소개한다. 우리는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극장으로 간다. 그 곳에서 한 미술사 학자가 이끄는 유럽 미술관 비디오 강의는 시즌제로 6월에 시작됐단다.

네덜란드와 독일 미술관에 집중한 두 개의 강의는 강연자가 직접 찍어온 사진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나는 렘브란트 자화상에 꽂혔다. 17세기 자화상이 이토록 화가 자신의 굴곡진 개인사를 정직하게 담고 있을 줄이야.

자화상은 렘브란트(1606-1669)의 예술적 성공과 명성, 그리고 아내의 죽음과 가족 관계의 고통, 이후 노년의 좌절을 극명한 음영으로 드러낸다. 작품이 그려진 당대의 정치사회경제 현실에 대해 강연자는 인문학적 배경 설명을 곁들인다. 우리의 눈이 그림의 시대적 맥락을 읽을 수 있게 돕는 친절한 시간이다.

후배는 근력 유지에도 관심이 많다. 나는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의 스포츠문화센터 프로그램 홍보지를 가져다준다. 그녀는 라인댄스 강좌를 수강하기로 했다며 기뻐한다. 재택근무자인 후배에게 매주 한 번의 댄스 타임이 새 활력을 줄 게 분명하다.

옛 동료 중 하나는 강남의 아파트살이를 접고 강북의 단독 주택으로 이사 갔다.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며 가드닝 요정으로 거듭난 그녀. 약초 공부를 하러 방송통신대를 다니더니 어느새 산딸기잼을 만들며 사업자등록증까지 받아냈다. 경북 예천의 농장에서 농사체험 알바 한달살이도 빡세게 치러냈단다. 다음 도전으로 다래잼을 만들 거라니. 넘치는 에너지가 매력인 이 정원 생활자, 부럽다.

다른 모임 친구들과도 모이면 먼저 걷기부터 한다.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우아하게 거듭난 망우리공동묘지는 나를 포함한 몇몇의 최애 산책 장소. 울창한 숲과 아기자기한 오솔길로 이어지는 묘역에 잠든 이들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사계절 아름다운 숲으로 이미 유명한 포천의 국립수목원도 봄꽃과 가을 단풍 시즌에 빼놓을 수 없는 목적지. 김밥 도시락과 커피를 챙겨가면 은혜로운 반나절 피크닉이 가능하다. 새로 생긴 지하철 4호선 진접역에 내려 바꿔 타는 버스로 접근성이 높아져 더 자주 가기로 한다.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오늘도 걷고 웃고 떠들어댄 우리들.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함께 기뻐할 그들이 있어 든든하다. 젊은 시절 크고 작은 이견에 얼굴을 붉혔던 기억들도 어느덧 웃으면서 되돌아보는 이야기 보따리다. 이게 바로 함께 익어간다는 그 맛일까?

이제부터는 각자 건강한 게 서로를 돕는 거다. 함께 동강의 단풍을 다시 보러 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오래 웃어주며 곁을 지키기, 그게 내가 그들에게, 또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의 전부일 것이다. 오래 그려왔던 명랑 노년! 내 꿈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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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https://brunch.co.kr/@chung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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