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럽다, '오염수 문제'를 기말고사에 활용 못한 것이
[서부원 기자]
▲ 6일 한 시도교육청이 일선 고교에 보낸 공문. 이 공문은 "국회 하태경 의원실로부터 자료 요구가 있어" 만들어진 것으로, 요구 자료는 "고등학교 기말고사 중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내용 포함 현황"이다. |
ⓒ 제보자 |
급기야 국회의원들이 일선 학교의 기말고사 시험지까지 들춰 볼 심산인 것 같다. 국회는 얼마 전 학교 도서관의 '현대 정치사 인물' 관련 도서 소장 여부를 보고하라는 자료 요청을 내려보내며 일선 학교 교사들의 집단 반발을 산 바 있다. 당시 공문엔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손석희 전 JTBC 사장, 심지어 세월호까지 적시돼 있어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비판을 샀다.
이번엔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바통을 이어받은 듯하다. 고등학교 기말고사 출제 문항 중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는지 보고하라는 내용의 자료 요청을 시도교육청에 보냈다. 이것을 조사하려는 의도를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발표한 최종보고서의 신뢰가 의심받는 상황에서 애꿎은 학교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다.
이유는 뻔하다. 일본 정부의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압도적인 반대 여론이 전교조나 지역 교사노조 소속 교사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는 식으로 여론몰이하려는 것이거나 중고등학생들에게까지 들불처럼 확산되는 반대 여론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혹자는 내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으려는 정치인의 '충성 경쟁'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유국희 원자력안전위원장이 지난 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계획에 대한 과학기술적 검토’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 권우성 |
후회막급이지만, 한국사 교사로서 이 좋은 출제 소재를 기말고사에 활용하지 못한 게 한스럽다. 오염수 방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근거를 제시해 논술하라는 것만큼 시의적절한 문항은 없을 성싶어서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학습 목표가 '동아시아 갈등 해결을 위한 노력과 평화를 위한 방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명시된 단원이 있다.
오염수 방류에 대한 찬반 논란은 시험 출제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만한 소재다. 토론을 통해 쟁점이 명확해지고 상반된 주장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아이들의 사회적 의식을 성장시키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다. 토론이 없으면, 아이들은 더더욱 어느 일방적인 주장을 마치 사실처럼 믿게 된다. 교사가 경계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교육부가 여러 차례 강조한 것처럼, 기존의 관행적인 강의식 수업을 대체하는 차원에서도 토론은 적극적으로 장려돼야 한다. 토론 수업에서 찬반의 쟁점이 확연할수록 효과적이지만, 핵심은 누가 뭐래도 시의성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안으로서, 아이들이 두루 알고 있는 것이라야 토론 수업 소재로 그만이다.
교과서에 전가의 보도처럼 권장되는 토론 수업 소재가 있긴 하다. 조선 후기 인조반정 직후 청나라의 군신 관계 요구에 대해 주전론과 주화론이 대립했던 상황을 둘로 나눠 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대개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사실이 부각되면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의 역사적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지금 다시 되새기는 '토론'의 효능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는 두 역사서의 '위대성' 논쟁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신숙주의 '배신' 논쟁 등도 아이들에겐 나름 익숙한 소재다. 중학교 때부터 해오던 토론이어서, 제시하는 근거마저 어슷비슷해 시작하기도 전에 김이 빠지는 느낌이 있다. 이는 시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라면 아이들의 눈빛부터 다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박근혜 정부 때 추진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윤석열 정부가 불 지핀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 논쟁을 들 수 있다. 국정교과서 문제는 굳이 찬반으로 가를 필요도 없을 만큼 반대가 압도적이어서 토론이라기보다는 성토대회를 방불케 했다. 결국 아이들의 바람대로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1년 만에 물거품이 됐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은 학교에선 '뜨거운 감자'다. 특히 남자 고등학생들에겐 쉽게 거론할 수조차 없는 주제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겠다며 수업 시간 토론 주제로 삼기가 여간 쉽지 않다.
그런데도 온갖 소란을 무릅쓰고 교사들이 민감한 주제를 기꺼이 화두로 삼는 건, 토론의 교육적 효과를 믿기 때문이다. '1타 강사'의 강의라도 수동적으로 주입된 지식은 어디까지나 수험용일 뿐이다. 시험장을 나서자마자 깨끗하게 '포맷'되는 건 그래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지식이라면 굳이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을까.
거듭 강조하거니와, 시의성이 토론의 고갱이라면 지금 오염수 방류 문제만큼 알차고 교육적인 주제는 없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압도적이긴 하지만, 쟁점을 찾아가다 보면 찬성 쪽 주장의 논리와 근거를 알 수 있어 나름 도움이 된다. 만약 아이들 모두가 반대 의견을 낸다면, 교사 혼자서라도 찬성 쪽에서 그들의 논리에 차분히 대응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토론은 승부를 내는 게 목적일 수 없다. 서로의 주장을 경청하고 논박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러자면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기꺼이 상대방의 주장에 동조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적어도 아이들은 오염수 방류 문제를 정치권이 프레임화한 '보수와 진보'나 '친일과 반일'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
▲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사진은 2022년 8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4차 상임전국위원회를 마친 후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
ⓒ 공동취재사진 |
이번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의 자료요청은 거칠게 말해서 '학교에서 오염수 방류 문제를 일절 언급하지 말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교사의 정당한 수업권과 평가권을 무시하는 행태일 뿐더러 나아가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사안이다. 기말고사에 출제한 걸 두고 문제 삼는 마당이니, 만약 이를 주제로 계기 수업이라도 진행했다면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모골이 송연해진다.
말이 난 김에, 기말고사도 다 끝났겠다, 8월 중엔 오염수 방류가 시작된다는 보도가 나오고 하니, 이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을 듯하다. 찬반을 묻는 건 이미 김이 샜고,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그저 IAEA가 대체 어떤 일을 주로 하는 국제기구인지 조사해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오염수 방류 문제는 미래세대 아이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다. 일본 정부가 오염수를 수십 년 동안 나눠서 바다로 흘려보내겠다고 하니, 한두 해로 말끔히 정리될 사안도 아니다. 국적을 떠나 기성세대가 아이들이 살아갈 터전인 바다를 오염시킬 권리는 없다. 명토 박건대, 시험이든 수업이든 학교에서 오염수 방류 문제를 다루는 건 당연하고도 시의적절하다.
부디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교사들의 입을 틀어막지 말라. 연이어 하달된 어이없는 공문을 읽으니, 1970년대 말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한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남긴 말이 떠오른다. 그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일갈했는데, 지금의 상황과 겹쳐져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서슬 퍼런 유신 시절 정치인의 어록을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관련기사]
- [단독] 고교에 '박원순' '손석희' '세월호' 책 보유 현황 제출 요구 https://omn.kr/24jz6
- [단독] 고교 이어 403개 대학에 '손석희''박원순''세월호' 책 현황 요구 https://omn.kr/24m02
- [단독] 하태경 "고교 기말고사에 '오염수' 문제 냈는지 보고하라" https://omn.kr/24ox1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