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도시 수원, 그 시작에 수원역이 있었다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역은 마치 터줏대감 같았다. 1905년 경부선과 함께 탄생하였으니, 120여 년간 수원의 성쇠를 지켜본 셈이다. 그동안 변화를 거듭해 철로가 십(十)자로 분기·교차하며 KTX와 도시철도, 민자역사와 환승시설을 품은 거대한 역으로 성장했다.
▲ 수원역 앞 수원역 앞 광장과 멀리 팔달문 방향으로 뻗은 매산로가 보이는 풍경. |
ⓒ 이영천 |
교통의 3요소는 연결시설(link), 결절점(node), 교통수단(mode)이다. 교통수단은 종속변수일 뿐이다. 철도나 도로 등 선(線)으로 나타나는 연결시설은 무릇 지역 변화에 중요 시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역 변화를 추동하는 제1의 요소는 정작 결절점이다.
결절점의 우리 말은 '마디'로 꺾이거나 변화하는 부위 간 연결을 자연스럽게 매개하는 기능으로 축약된다. 교통에서 마디는 버스 정류장이나 터미널, 나들목과 분기점, 철도역과 항구, 공항 등이다.
결절점으로 사람과 재화가 모이고 흩어진다. 그 과정 자체가 도시 활동이고, 이런 활동의 빈도를 바탕으로 도시 공간은 변화하며 성장동력을 얻게 된다. 이를 우리는 그간 '근대화'라 여겨왔다. 산업혁명 이후 성장한 근대도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외 없이 이런 과정을 밟아왔다.
수원의 결절점
수원은 화성(華城)이 모태다. 1924년 지도를 보면 화성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역과 남문시장을 잇는 '매산로' 주변에도 도시화 초기에 진입하는 모습이 보인다.
▲ 수원(1924년) 당시 수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00년 전 지도. 화성 중심의 시가지와 수원역 앞 일부, 매산로 변으로 형성된 초기 시가지를 볼 수 있음. |
ⓒ 서울역사박물관 |
철도는 지역 변화를 추동하면서 동시에 지역을 단절하는 시설이기도 하다. 철도의 이런 양면성으로, 수원역 서쪽으로 도시 확산은 경부선에 막혀 오랜 기간 제약을 받아왔다. 화성과 함께 축조한 서호(축만제)와 만석거 주변 드넓은 농경지가 배후지 역할을 담당하는 정도였다.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이 1967년 팔달산 남측 공설운동장 자리로 이전해 온다. 도청 이전은 수원시가 경기도 행정 중심으로 거듭남을 의미했다. 도청 이전으로 증가한 행정수요는 도시 활동을 증가시켰다. 이는 또 다른 성장 기폭제였다. 이의 영향으로 산업화가 뒤따라 밀려온다. 철도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 수원역 앞 역 앞을 지나는 도로와 주변. |
ⓒ 이영천 |
이러한 제반 교통시설의 발달로 수원은 거대도시로 성장할 동력을 얻는다. 1949년 시 승격 당시 5.3만 인구가 2019년 기준 123만으로, 면적은 약 30㎢에서 121㎢로 확대되었다. 이 모든 것의 시작과 중심에 강압적 근대화 물결을 타고 온 수원역이 있었다.
수원역 앞
▲ 수원 역전시장 수원역 남동측에 자리한 역전시장. 복합기능을 수행하며, 지하에 다문화푸드코트가 입점해 있음. |
ⓒ 이영천 |
재화가 모이는 곳에 시장이 섰다. 시장 주변으로 상점과 소비재, 찻집이나 주점 등이 기생하는 공간구조가 형성된다. 이런 기능이 철도역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숙박업이, 이는 연쇄적으로 홍등가와 집창촌을 끌어들였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서울·영등포·용산·청량리역을 비롯하여 경부·호남선의 대도시 철도역이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간선철도가 지나는 주요 철도역마다 비슷한 공간구조를 갖게 된, 아픈 역사의 단면이다.
▲ 로데오거리 하천을 복개해 조성된 매산로 테마 거리를 로데오거리라 부름. 젊음의 밝고 환한 기운이 충만한 공간. |
ⓒ 이영천 |
매산로 건너 향교로가 로데오거리다. 역에서 수원 세무서까지 6백여 미터 공간이다. 젊은이 공간으로 무엇보다 이들의 발길이 잦아진 건 무척 고무적이다. 공간의 얼굴이 밝아지고 활기가 돈다.
젊은이 공간은 어디나 그렇듯, 거리는 환한 웃음으로 밤낮없이 분주하고 명랑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군에 정감 가는 거리, 특히 차 없는 거리가 된 건 백미 중 백미다. 길을 걸으며,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고 자유롭다. 이는 여타 도시에서도 본받아야 할 모범 사례로 보였다.
하지만 수원역 앞이라는 단위 공간이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독버섯 같은 집창촌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젊은이 거리는 인접한 집창촌과 오랜 시간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험난했던 공간 찾기
60여 년이다. 집창촌이 자리한 시간이다. 2021년에서야 꼬리를 감췄다. 자진 폐업이란 명분이라지만, 특유의 풍선효과로 더욱 음성화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이 높다.
나쁘다는 건 다 알고 있다. 다만, 인식의 깊이나 실천 의지가 없었을 뿐이다. 먹이사슬로 얽히고설킨 생태계 문제였다. 퇴출에 대한 본격 논의는 2004년 '성매매 특별법'제정부터이니, 무려 20여 년을 방치한 셈이다. 도시 공간에서 하나의 기능을 제거하기란, 그 기능의 시시비비를 떠나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 변화하는 공간 옛 집창촌 당시 사용하던 건물을 개보수하는 모습. 당시의 공간은 점차 다른 기능이 침투하면서 점차 밝아지고 있음. |
ⓒ 이영천 |
집창촌이던 자리의 건물 개보수 현장을 보았다. 공간도 하나둘 말끔하게 단장한 상업시설로 채워지고 있었다. 공간의 낯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기능으로 이곳을 채워야 할까.
역 앞은 젊음으로 충만하다. 공공이 개입해 청년들이 꿈을 잉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은 없을까. 아니면 반도체와 화성, 수원역 앞 문화적 특성을 연계하는 건 어떤가.
수원 비행장
도시 공간엔 탐욕적 개발과 안온한 삶을 지키려는 보존이 끊임없이 경쟁한다. 정치인을 비롯한 토건족은, 욕망을 자극해 끊임없이 철거재개발을 노린다. 수원역을 비롯한 구시가지 일원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현주소다.
그중 수원 비행장 이전이 화두다. 비행장 주변 소음은 오랜 민원이다. 또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반경 내 접근표면 인근은 물론 그 주변 지역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오래전부터 수원시는 비행장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비행장이 이전하면 구시가지 일원이 접근표면, 즉 고도 제한에서 해제되기 때문이다.
▲ 수원 시가지(2022) 수원역에서 팔달산과 화성을 잇는, 수원의 얼굴이라 할 만한 항공사진. |
ⓒ 수원시청 |
개발과 보존이란 해묵은 담론보다,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시민이 최우선이다. 이 시각 수원역 앞에서 추억을 쌓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다. 장소성은 그런 것이다. 로데오거리는 나지막한 건물군에 정감 넘치는 거리다. 기억의 보물창고다. 화성과 팔달산, 매산로가 잇는 수원역까지 연속된 공간은 그야말로 수원의 얼굴이다. 이를 보존하여 문화적 가치를 높여 갈 방안을 찾는 게 더 현명해 보인다.
비행장 이전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욕망을 자극해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의 행위까지 비판하고 싶진 않다. 우리 도시 어디에서건 비일비재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철학 없는 그들이 그동안 우리 도시를 망쳐온 주범이라는 사실을, 이젠 시민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만은 말해두자.
한 공간의 변화와 미래는 그래서 시민 뜻으로 결정해야 한다. 한번 파괴해 버리면 다시 복원해 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 하나만은 반드시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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