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팔아 "일본 살리자"... 이처럼 대담한 불교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충북 제천시 덕산면 신륵사 극락전(충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32호) 외벽에서 발견된 `사명대사행일본지도(泗溟大師日本行之圖)' . 이 벽화에는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강화정사로 일본을 상륙했던 모습이 나타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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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에 임진왜란 승병을 이끈 사명대사 유정의 활약은 대단한 동시에 다종다양했다. 승군을 규합해 평양성 탈환 작전에 참가하고, 한양 인근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불법으로 일본군을 설복시키는 초인적인 면모도 발휘했다.
영조 임금 때인 1742년에 제작돼 경남 밀양시에서 출토되고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탁본을 확인할 수 있는 <송운대사비>는 송운으로도 불린 그가 창칼이 아닌 필담으로 일본군을 물리친 사건을 담고 있다. "왜적들에게 살인을 즐기지 말라고 깨우치니, 왜적이 그의 늠름한 의용을 보고 즉시 경의를 표하고 무리들을 경계하였다"라며 "이 때문에 영동의 9군(郡)은 도륙을 당하는 참상을 면할 수 있었다"라고 비문은 알려준다.
창칼이 아닌 붓끝을 휘둘러 적군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은 종전 6년 뒤인 1604년에 사신으로 파견돼 일본과 강화 협상을 벌일 때도 증명됐다. <송운대사비>는 "붙잡혀 간 남녀 삼천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서술한다.
사명대사는 군사 지휘관, 심리전 전문가, 외교관에 더해 군사 행정가의 면모도 보여줬다. 팔공산성·금오산성·용기산성·남한산성·부산성 등을 축조하고 조선군이 조총 사용법을 연마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유학자 출신이 아닌 승려 출신 의병장이었다. 숭유억불 구조하에서 주목받기 힘든 승려가 그처럼 특별히 부각된 것은 그의 역량이 출중했기 때문이라고 평할 수밖에 없다.
▲ 권상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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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명대사를 본받아 나라를 살리자는 발언이 해방 5년 뒤가 아닌 해방 5년 전인 1940년에 나왔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사명대사를 본받아 일본을 살리자는 주장이 일제강점기 때 나왔으니, 시대 상황과도 맞지 않고 자연스러울 수도 없었다. 발언의 주인공은 20세기 한국 불교에서 상당한 족적을 남긴 권상로다.
권상로는 1879년 2월 28일 경북 문경에서 출생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17세 때인 1896년에 문경 김룡사에서 출가했다. 일제 강점 이듬해인 1911년에 문경 대승사 주지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주로 불교계 언론이나 교육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사찰 학교에서 한문 교사나 불교 강사로 일하거나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일하기도 했고, <조선불교월보> 등의 편집자나 발행인으로도 활동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일본군국주의 선전전에서 두각을 보인 권상로는 승려들과 불교 신도들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해 갖가지 논리를 개발했다. 그런 와중에 선보인 논리가 사명대사를 본받자는 것이었다.
문제의 글은 1941년 4월 1일자 <불교시보> 제57호에 수록된 '승려 지원병에 대하여'라는 글이다. 그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 권상로 편에 인용된 이 글에서, 승려가 일본군에 지원하는 것은 종교적 탈선이 아닌가 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불교자로서의 탈선적이 아닌가 하지마는 아니다"라고 단언하면서 제시한 사례 중 하나가 사명대사의 의병운동이다.
그는 승려들의 일본군 지원을 촉구하면서 "이조의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대사의 여러 법(法)형제는 판탕(板蕩)을 당하여 장검입공(仗劍立功)하였고"라고 말했다. 사명대사가 스승 및 수행자들과 함께 국난을 극복하고자 무기를 들고 일어나 공을 세운 일을 언급하면서, 이런 선례를 따라 군국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독려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항일 승병장을 본받아 일본군국주의 전쟁에 가담하자고 촉구했던 셈이다.
<고려사> 최영열전에 따르면, 최영 장군은 "당태종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우리나라가 승군 3만 명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파했다"고 말했다. 송나라(북송) 사신단이 고려를 방문한 뒤에 남긴 <고려도경>은 "이전에 거란이 고려에 패배한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강감찬 장군이 거란족 요나라의 침공을 물리칠 때도 승군의 역할이 컸다는 언급이다.
이런 기록들에 나오는 승군은 불교 승려이면서도 국선도 수행자와 비슷했다. 이런 이들이 국난 때마다 무기를 들고 일어난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계승돼 사명대사 같은 인물이 출현하게 됐다. 중국이나 북방 유목민 혹은 일본 같은 외세가 침입해 올 때마다 한민족 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이 됐던, 이 같은 전통을 친일파 권상로가 일제를 위한 선전전에 활용했던 것이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3권에 실린 '권상로: 불교계 최고의 친일 학승'이란 글에서 불교사 전문가 임혜봉은 "권상로의 친일 논설은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매일신보>에 1편, <신불교>에 8편, <불교시보>에 3편 등 도합 12편이 있으며, 따로 19편의 친일 논설을 엮은 <임전의 조선불교>라는 단행본이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글쓰기 이외에 말하기의 방법으로도 그의 친일 활동은 전개됐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권상로 편은 "1936년 10월 경기도 일원을 돌면서 순회강연을 했다"라고 말한다. 1937년에 관한 대목에서는 "같은 해 8월과 9월 경상북도와 함경북도에서 총독부 학무국 사회과가 주관한 순회 시국 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위의 임혜봉 글은 "1938년 7월 20일 법주사와 보은군청이 합동으로 주최한 시국 강연회에 연사로 나가", "7월 22~31일에는 법주사 승려들에게 전쟁 시국에 대해 강연을 했다", "그의 친일 강연 행각은 8월 7일부터는 건봉사로 이어졌다" 등등의 설명을 한다.
어쩌다 한 번씩 친일 강연을 하는 게 아니라 꽤 전문적이고 지속적으로 순회 강연을 했다. 친일 글쓰기나 강연이 그의 주요 수입원이었다는 판단을 갖게 만든다. 친일로 돈을 버는 '프로 친일파'였던 것이다.
프로는 과감할 수도 있지만, 조심스러울 수도 있다. 한 번의 실수로 전부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권상로는 과감한 쪽을 선택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 파격적인 논리를 학자답지 않게 과감히 구사했다. 사명대사와 더불어 석가모니까지 일본군국주의 전쟁에 끌어들였다.
임혜봉 글에 인용된 1942년 12월 1일자 <신불교> 제43집 기고문은 특이한 주장을 담고 있다. 권상로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1941.12.8) 1주년에 맞춰 쓴 이 글에서 음력 12월 8일이 석가모니의 성불을 기리는 성도(成道)일임을 부각시켰다. 진주만 기습은 양력 12월 8일에 있었고 성도일은 음력 12월 8일이지만, 그는 일본이 12월 8일에 미국을 공습한 일을 두고 "금번 대동아의 성전은 틀림없는 여래의 사명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반민특위 끌려갔지만... 결국 국사편찬위원에도 임명
그가 대담한 불교인이라는 점은 일본이 금속류 공출을 위해 불상을 빼앗는 일까지 칭송한 사실에도 나타난다. 임혜봉 글에 인용된 1943년 5월 1일 자 <신불교> 제48집 기고문에는 "이 얼마나 감격하며 얼마나 황송하며 얼마나 장쾌하냐"라며 "전승을 위하여 교주의 성상까지 내어 바친다는 것은 불교가 아니면 없을 것이요"라고 감격하는 권상로의 글이 들어 있다.
해방 4년 뒤인 1949년, 그는 힘든 일을 잠시 겪었다. 해방 이후의 한국에서 1965년과 더불어 반일 역량이 가장 강렬했던 그해에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특위에 끌려갔다. 하지만 기소유예처분으로 종결됐다.
그 뒤 한국 사회는 권상로가 가는 길을 꽃길로 장식해 주었다. <친일인명사전>은 "1952년 동국대학교 학장을 거쳐 1953년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고 말한다. 1955년에는 친일파인 그가 국사편찬위원에도 임명됐다. 1962년 광복절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한국 불교계도 그의 앞길에 꽃을 뿌려주었다. 위 사전은 "중앙불교연구원장,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원장, 현대불교·불교사상사 사장 등을 지냈다"라고 한 뒤, 4·19혁명 5주년에 사망한 그의 장례를 위해 1965년 4월 23일 한국불교총연합회장이 거행됐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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