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에 엇갈리는 진술... 열등감이 문제였다

조영준 2023. 7. 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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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266]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침묵>

[조영준 기자]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침묵>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이월(김보라 분)은 부모 없이 수녀원에서 자라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독백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마스 날 성당 계단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면서부터다. 수녀원에서의 삶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극 중에서 직접적으로 그려지는 부분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모두를 알 수는 없다. 일반적인 삶보다 더 많은 규칙과 규율 속에 생활했어야 했음이 분명하고 학교에서는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부모가 없이 시작된 삶은 어쩌면 숫자 상으로 단순히 하나를 잃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은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월이 지금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고 있다.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 정연(신세휘 분)의 죽음이 이월의 괴롭힘 때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전날 실제로 두 사람이 다퉜던 것은 사실이다. 사소한 말다툼 도중에 서로 감정이 격해졌다고 그녀는 진술한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연이 이월보다 피아노를 더 잘 치고, 집도 더 잘 살고, 아버지도 높은 지위를 갖고 있어 부러운 나머지 저지르게 된 범죄라고 단정 짓는다. 이에 대해 이월은 친구의 죽음이 자신이 아닌 그녀의 아버지가 저지른 폭력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의 집이 수많은 부적과 양초로 가득했다는 이야기도 함께다. 한 사람의 죽음과 또 한 사람의 진술. 이를 의심하는 형사. 이 영화 <침묵>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혼재한 감정과 몽타주, 환기를 위해 다소 희생된 듯한 내러티브 등 배준원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다. 다만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확실한 두 가지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의 속성과 하나의 대상을 평가하는 인간의 비이성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소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그 실체를 정확히 표현하기가 모호하다는 뜻인데, 바꿔 말하면 여기에 정확한 근거나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침묵이 자리하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하면서 타인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침묵>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02.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취조 장면에서부터 내막이 드러나는 듯한 후반부의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신에서도 정확한 증거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형사들이 이월을 정연의 죽음에 대한 가해자로 의심하는 과정에도, 이월이 정연의 아버지를 피의자로 진술하는 지점에도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형사는 단지 이월이 부모도 없이 수녀원에서 자란 환경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더 좋은 성장 배경을 갖고 있는 친구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이월 역시 그 은밀한 장면을 다른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목격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실제 현장 조사 결과 이와 관련한 물품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진술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다.

아직 추측으로만 존재하는 이월의 열등감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영화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부터다. 감독은 피아노가 매개가 되어 만나게 되는 이월과 정연의 모습을 이 시점에서부터 조금씩 꺼내기 시작한다. 자라온 환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각자의 사정 속에서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빠르게 가까워지도록 만든다. 문제는 그 중심에 놓여있던 피아노라는 대상에 대한 각자의 마음이 너무 거대했다는 사실이다. 진흙탕 같은 인생 속에서 유일한 동아줄처럼 붙들고 있던 이월에게도, 자신을 죽여서까지 아내를 되살리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폭력 아래에 놓여있던 정연에게도 피아노와 관련된 모든 것은 어떻게든 움켜쥐어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03.
"이월아, 세상에서 네가 제일 불행한 것 같지? 아니야. 너만큼 나도 사는 게 지옥 같아."

그러니까 이 영화가 두 인물의 모습을 통해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서로를 향해 있던 감정을 날카롭게 세운 다음, 하나의 칼날을 부러뜨리고 남게 된 나머지 하나의 칼날에 사건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 이때 부러뜨리는 쪽의 칼에 더 나은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약한 칼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전부 알 수 없는 형사의 의심이 반쪽짜리 의혹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이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영화는 어느 곳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듯한 이월이 정연에게 마음을 조금이나마 붙이도록 만든다.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가 바라보는 두 가지 요소 가운데 열등감과 관련한 지점의 시선이 이월과 정연 두 인물 사이에서 그려진다면, 하나의 대상을 평가하는 비이성적인 태도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이월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통해 표현된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기는 했으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가운데 배경적 요소를 배제한 채로 이월을 바라본 인물은 정연이 유일했을 정도다. 폭력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면서까지 일진 무리 아이들에게 담배를 팔던 그녀를 단순히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똑같은 나쁜 아이로 바라봤던 배경에도 순수하지 못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드러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이월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급격히 바뀌기 시작한다.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 어떤 증거도 없이 의혹은 곧 진실이 된다. 그녀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해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아니 수녀원의 수녀와 신부들이다. 내몰리고, 내몰리고, 또 내몰리고.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나마 유이했던 사랑인 피아노와 친구 정연으로 인한 아픔은 그동안 쌓아왔던 분노를 더 이상 누를 수 없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침묵>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04.
'지금 다 고해할게요'. 이월이 남기는 마지막 말이다. 그 고해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정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이월이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꽤 많은 오해와 거짓, 질투로 얼룩져 있다. 그중에는 사실과는 다르지만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도 있고, 외부의 잘못된 정보로 인해 생겨난 것도 있다. 태생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고백과 고해, 이해와 용서의 시간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벼르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모두가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순간에 말이다. 이 영화의 '침묵'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서늘하고 무섭다. 말을 참고 아끼는 동안 쌓이는 다른 것들이 결국 모두를 가라앉게 만들고 만다.

최근 다양한 작품에서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김보라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삶의 막다른 곳에 이르러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을 포용할만한 여유가 없는 인물 이월을 잘 그려냈다.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 자체가 극의 서스펜스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이 작품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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