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0시간 일하고 월급이 고작…" 日 엘리트 코스의 추락 [글로벌리포트]
밤 9시, 일본 경제산업성 사무실 팩스에 신호음이 울렸다. 의원실에서 보낸 팩스가 도착한 것이다. 30대 공무원 스즈키(가명)가 집어 든 문서엔 단 한 문장만 적혀있었다. "내일 있을 위원회에서 질문할 내용을 전달할 테니 의원회관으로 모이라". 질문 내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스즈키는 부랴부랴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나가타초(永田町)의 의원회관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그렇게 받은 질문지도 내용이 막연했다. 조심스레 의원실에 물어봤지만 역정 섞인 말만 돌아왔다.
일본 중앙부처 공무원의 일상을 야후재팬은 이렇게 전했다. 매체와 인터뷰한 후생노동성의 30대 공무원은 "법안 심의 등으로 바쁠 때는 열 명이 일감을 나눠 일해도 오전 3시에나 귀가한다"면서 "잠시 눈만 붙였다가 오전 7시에 출근한 적도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때 '관료의 나라'로 불렸던 일본에서 공무원의 인기가 추락하고 있다. '엘리트 코스'로 각광 받던 종합직 공무원(한국의 5급 공무원에 해당) 지원자 수가 약 10년 동안 반 토막 났고, 임용된 지 10년이 안 된 퇴직하는 공무원은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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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60% 이상이 30대 전에 그만둘 생각"
지난달 일본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2023년도 국가공무원 종합직 시험 신청자 수는 1만4372명에 그쳤다. 11년 전인 2012년(2만5110명)에 비하면 57.2%, 역대 최다였던 1996년(4만 5254명)에 비하면 31.7%에 그친다. 한때 50.1대 1에 이르렀던 종합직 평균 경쟁률도 올해 7.1대 1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젊은 공무원의 퇴직도 늘고 있다. 일본 인사원(한국의 인사혁신처에 해당)에 따르면 재직 10년 미만의 종합직 퇴직자 수는 2013년 76명에서 2020년 109명으로 늘었다. 요시이 히로카즈(吉井弘和) 게이오대 준교수는 현지 매체에 "과거엔 전직하는 공무원이 극히 드물었지만, 최근에는 20대 공무원의 60~80%는 30대 전에 퇴직을 생각한다고 한다"고 전했다.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대 출신의 비율이 줄어든 것도 인기 하락을 실감케 하고있다. 종합직 합격자의 도쿄대 출신 비율은 2014년 23%에서 2023년 10%로 줄었다. 한때 '관존민비(官尊民卑)'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공무원의 위신이 높았던 과거와는 딴판이다.
종합직 공무원의 근무 의욕을 떨어뜨리는 '원흉'은 심야 잔업을 유발하는 국회 대응 업무라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인사원이 44개 행정기관을 조사한 결과, 의원들이 공무원을 상대로 사전에 질문을 알려주는 '질문 통고'가 너무 느리다는 불만이 많았다.
지난해 11~12월 조사 결과 공무원들이 마지막으로 답변서 작성에 착수한 평균 시각은 오후 7시 54분, 모든 답변 작성을 마친 평균 시간은 새벽 2시 56분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야근자를 오전 업무에서 빼주지 않아 아침이면 똑같이 출근하는 상황이 반복된다고 한다.
'과로사를 유발할 수준'까지 일하는 장시간 근로도 원인으로 꼽힌다. 2020년 12월~2021년 2월 과로사 위험 기준인 월 80시간을 초과한 종합직 공무원이 6532명으로 조사됐다. 같은 기간 월 100시간을 초과한 공무원도 2999명에 이르렀다.
특히 20대 공무원의 열 명 중 셋은 과로사 기준을 넘겨 근무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전직 후생노동성 관료 센쇼 야스히로(千正康裕)는 일본 공직 사회에 대해 쓴 '블랙 가스미가세키(Black + 관가를 뜻하는 霞ヶ関)'란 책에서 종합직 공무원은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27시 20분(다음날 3시 20분)에 청사에서 나가는 게 일상적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일하고도 잔업비를 받는 경우는 약 30%에 불과하다. 급여 수준도 높지 않다. 닛케이에 따르면 환율을 반영한 동일 직급 공무원 급여를 비교하면 일본 공무원의 급여는 미국의 50%, 영국의 80%에 그친다.
아울러 과거와 달리 담당부처 대신 정치인 총리가 주도하는 총리실에서 주요 정책이 결정되다 보니 관료의 영향력이 축소된 점, 사기업에 비해 낮은 보수·복지 수준도 공무원의 인기가 떨어지고 젊은 공무원이 떠나는 요인으로 꼽았다.
이처럼 공무원 인기가 떨어지고 퇴직자가 늘자 정부 차원에서 '공무원 달래기'에 나섰다. 최근 인사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어도 공무원이 주 4일 근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닛케이는 "민간 기업과의 인재 쟁탈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조치"라고 풀이했다.
당일 근무 종료 후 다음 날 근무 시작 때까지 11시간 이상 지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정도론 미흡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외무성 관료 출신인 시사 평론가 가와토 아키오(河東哲夫)는 지난 5월 뉴스위크에 기고한 글에서 “내 경험에 비춰봤을 때 이는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런 조치보다는 근무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를 분석하고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처럼 한국 공무원 인기가 식으며 경쟁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5급 공무원시험(옛 행정고시) 경쟁률은 2021년 43.3 대 1→2022년 38.4대1→올해 35.3 대 1로 매년 하락세다. 7급의 경우, 경제 한파로 실업자가 속출했던 1998년 203.7대 1였지만 올해는 40.4대1로 낮아졌다. 9급도 올해 22.8대 1로 31년 만에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원자도 줄고 있다. 올해 5급과 9급 지원자는 지난해보다 각각 1500여명, 4만3998명 줄었다. 합격하고 금세 퇴직하는 인원도 늘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재직 5년 미만 퇴직 공무원(2022년 기준)'은 2017년 5181명에서 2021년 1만693명으로 5년 사이 2배나 증가했다.
공무원의 인기가 시들한 원인도 일본과 유사하다. 민간기업에 비해 낮은 연봉, 상명하복식의 문화, 경직된 업무 환경이 요인으로 꼽힌다. 9급 초임을 최저임금법으로 계산하면 월 206만5690원이다. 최저임금(201만원)보다 5만원가량 많다.
공무원 보수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공무원 임금 인상 폭은 1.7%이다. 반면 지난해 물가인상률은 5.1%이다. 위원회는 지난 3년간 누적된 물가인상률을 적용해 보면 공무원 임금은 외려 7.4% 줄었다고 주장했다. 선배 세대보다 연금 예상액이 줄었기에 청년 세대엔 공무원이 큰 매력이 없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넥스트리서치가 지난해 기획재정부 등 19개 기관을 조사한 결과, 공직에 몸 담으며 '번아웃'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52%, 이직까지 생각했다는 비율도 37%에 달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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