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는글쓰기] 너무 비싼 평양냉면, 그런데 그만 빠져버렸습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편집자말>
[이정은 기자]
덥다. 더위가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평소에 외식이나 배달 음식을 즐기지 않다 보니 음식을 하며 불 앞에 서야 하는 사람에게 이 여름은 유난히 힘겹게 다가온다. 그러니 날이 더워지면서는 자연스레 간단한 음식을 찾게 된다.
집에서 음식을 할 때도 최대한 불을 적게 쓰는 메뉴로, 이따금 밖에 나가서도 가급적 시원한 메뉴로 말이다. 외식을 썩 즐기지 않는 내게도 이름만으로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메뉴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냉면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평양냉면.
▲ 해민면옥, 인천 부평 |
ⓒ 이정은 |
처음부터 평양냉면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2015년의 봄. 남편과 함께 나간 나들이에 친구가 합류했고, 여의도에서 만나 아직 다 피지 않은 벚꽃을 구경한 후 냉면과 돼지갈비를 먹으러 한 냉면집을 찾았다.
셋 모두 냉면을 좋아하지만 평양냉면은 경험한 적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호기롭게 주문한 평양냉면이 나왔고 한 젓가락을 먹은 셋은 말없이 눈치 게임을 하게 되었다.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지만 사정 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그 맛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행주 빤 물. 정말 딱 그랬다.
물론, 행주를 빤 물의 맛이 어떤지 직접 경험한 적은 없었었다. 그러나 정말 행주를 빤 물을 맛본다면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싶은 그 정도의 맛이었다. 우리 셋은 모두 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기억을 되짚어가며 '면에 식초를 뿌리랬나?' 하고 면을 들어 식초를 뿌려보기도 하고, '겨자를 어떻게 넣으랬지?' 하고 겨자도 넣어봤다. 맛을 살리기 위해 뭔가를 추가할수록 기대했던 맛과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
▲ 필동면옥, 필동(충무로) |
ⓒ 이정은 |
그런데 입맛도 변하는가 보다. 몇 년이 지난 후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평양냉면. 그 생각이 사라질 줄 모르더니 기어코 나를 다시 그 앞에 앉게 만들고, 먹었고, 빠져들고 말았다.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범수는 진주에게 "'뭐지 이거?' 하다가 다음 날 갑자기 생각이 나. 그때부터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거든. 아마 오늘 밤에 자다가 생각날 수도 있어요. 아 뭐지 이거? '평냉이 먹고 싶어' 막 이런다니까" 하는 대사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 서령, 강화도 |
ⓒ 이정은 |
평양냉면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평양냉면을 좋아한다고 말을 하면 보이는 반응 중 하나는 맛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너무 바싸다'는 것이었고 '동네 마트에서 파는 냉면 육수가 얼만데...'라는 말로 이어졌다. 가격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 역시 대기업 공장에서 나오는 냉면 육수를 선호한다.
여름이 되면 우리 집 냉장고에 빠지지 않는 식재료가 바로 냉면 육수다. 지금도 우리 집 냉장고 속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천 원짜리 육수는 식탁 위에 참 다양한 메뉴로 등장하게 된다. 이름에 맞게 냉면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김치와 만나 김치말이 국수로, 어느 날은 도토리묵과 함께 묵사발로 변신하기도 한다.
▲ 능라도, 광화문 |
ⓒ 이정은 |
물론 모든 외식이 재료비만으로 책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무조건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만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냉면은 다르다. 조미료 하나 없이 한우를 넣고 끓여 이정도로 깊은 육수 맛을 만들어낸다면, 심지어 자가제면까지 한다면 그 정도의 비용은 충분히 지불할 용의가 있다.
결코 저렴한 비용은 아니지만 재료의 원가와 들어가는 부수적인 비용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금액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공장에서 나오는 냉면 육수의 재료를 보면 그 또한 판매되는 가격을 납득할 수 있는 재료들이고.
▲ 을지면옥, 을지로(지금은 사라짐) |
ⓒ 이정은 |
결국은 취향의 차이 아닐까. 며칠 전 만난 친구는 평양냉면을 먹어 본 적 없다고 했다. 평양냉면과의 첫 만남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며 자신은 비빔냉면을 주문하고 내 것의 육수를 맛 보았다.
평양냉면을 처음 맛 본 친구의 반응은 어땠을까? 다행히 진한 육향을 가장 먼저 얘기한다. 걱정했던 것처럼 행주 빤 물이 아니라 오히려 꽤 맛있다며 웃는다. 웃는 친구의 얼굴을 보는 나도 웃음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꽤 큰 법이니까.
바야흐로, 냉면의 계절이다.
▲ 우래옥, 을지로 |
ⓒ 이정은 |
▲ 을밀대, 마포 |
ⓒ 이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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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정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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