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고객에 성폭력까지... '감정 노동'에 맞선 여성들
[송주연 기자]
백마 탄 왕자님(?) 시리즈가 부활한 듯한 JTBC 드라마 <킹더랜드>. 이 드라마는 킹호텔의 우수사원 천사랑(임윤아 분)과 호텔의 본부장 구원(이준호 분)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부와 권력이 있지만 웃음을 잃은 남자와 평범하지만 상냥하고 밝은 여성이 커플이 되어 가는 과정은 때론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드라마를 놓치지 않는 이유는 사랑과 그 친구들인 다을(김가은 분)과 평화(고원희 분)의 '일하는 모습' 때문이다. 이 셋은 실제로도 여성이 많이 종사하는 대표적인 서비스 직종인 호텔리어, 매장직원,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한다. 그리고 이들이 드라마에서 겪는 일들은 우리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겪고 있는 '감정노동'의 실체를 꽤 면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세 여성의 경험은 극 중에서 이들 주변에 있는 남성들, 심지어 같은 일을 하는 남성의 경험과도 많이 다르다.
<킹더랜드>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노동의 실체를 따라가 본다.
▲ 사랑은 고객의 마음을 먼저 헤아림으로써 미소에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
ⓒ JTBC |
드라마의 주인공인 사랑은 호텔리어다. 국내 굴지의 호텔에 2년제 출신으로 입사했지만, 누구보다 진심을 다해 일해 최고 친절사원으로 뽑힌다. 사랑은 신입 시절 선배에게 "내 감정 따위는 없다"(1회)고 교육받고 '헤르메스' 미소를 연습하지만, 이런 미소에도 '진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후배들을 이렇게 교육한다.
"친절의 기본 원칙은 마음과 표현이예요. 고객을 환영하는 마음이 먼저고, 그것을 표현하는 게 서비스입니다."(1회)
사랑의 이런 모습은 감정노동을 할 때 '가짜'라는 마음을 줄이기 위한 하나의 심리적 기제로 볼 수 있다. <감정노동>의 저자 엘리 러셀 훅실드에 따르면 사람들은 감정노동을 할 때 '가짜'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감정이 '진실'이라 믿을 수 있는 여러 심리적 조치들을 취한다. 고객을 가족이라 생각해보거나 환영한다고 믿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사랑은 아마도 고객을 환영한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미소가 '진실'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더라도 최대한 고객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죄송하다 사과하고 마음을 풀어들이는 게 메뉴얼"인 곳에서 일하는 사랑은 종종 자신이 '억지로 웃는다'고 느낀다.
이런 사랑을 사랑하는 그룹의 본부장 구원은 사랑을 '천가식'이라고 부르며 가짜 미소를 짓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는 사랑의 과도한 감정노동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이런 걱정과 요구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처음 그가 사랑에게 '웃지 말라' 요구했을 때 그가 떠올린 건 어릴 적 엄마를 잃고 슬픈 자신을 미소로 대해주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즉, 그의 이런 요구는 사랑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극받지 않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하게 된 후에도 그의 '자기중심적'인 면은 여전하다. 5회 VIP고객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사랑의 모습을 본 구원은 그렇게 일하지 말라고 요구하며 이렇게 말한다. "천가식씨가 남들 비위 맞추는 게 나한텐 더 큰 모욕이야." 이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는 논리다. 아마도 이에 사랑은 자신의 노동을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때문에 사랑은 자신을 위하는 구원의 말들에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맞받아친다. "비위 맞추는 게 아니라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구원의 이런 모습들은 늘 주변을 먼저 살피고, 업무상 미소에도 진심을 담기 위해 고객들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보는 '타인지향'적인 사랑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 다을은 일터에서 평등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진상고객에게 화를 내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대하는 프로다움을 지녔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늘 쩔쩔맨다. |
ⓒ JTBC |
세 친구 중 유일하게 결혼을 한 다을은 면세점에서 일한다.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팀장이 되고서는 불합리한 전통들을 바꿔 간다.
막내가 간식을 사 오던 전통을 없애고, 부당한 지시를 받는 일이 없도록 동료들을 배려한다. 이런 다을의 평등을 지향하는 리더십은 매장 분위기를 좋게 만든다. 또한 다을은 진상고객에게 웃으면서도 끝까지 단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5회).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매운 것'을 멋으며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며 또다시 일에 집중한다. 일터에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다을도 가정에선 '비굴모드'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다을은 퇴근 후엔 종종거리며 아이를 돌보고 식구들의 식사를 준비한다. 집에서 TV만 보고 있는 시어머니의 '빨리 밥차려라'는 말에도 순종하고 자신이 미리 준비해 둔 음식들을 낮 동안 와서 먹어버린 시가 식구들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인다. 4회 어린 딸이 이런 시가 식구들을 "밥도둑"이라고 지칭할 때에도 "엄마 음식 솜씨가 좋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해"라며 상황을 좋게 해석할 뿐이다. 이 장면은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감정노동은 가정에서 더 가혹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반면, 다을의 남편은 그녀가 '도와달라' 요청할 때마다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능숙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주변을 살피고 보살피는 여성의 모습과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 드는 남편의 모습은 꽤나 대비되어 보였다.
이중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오평화
항공사 승무원인 평화는 일터에서 이중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성적인 폭력에도 노출되어 있다. 평화는 고객들의 부당한 요구에 웃으며 응대해야 하는 것은 물론, 부하직원의 몸무게까지 통제하려 들면서 정작 업무에 있어서는 책임지지 않는 '진상' 상사의 비위도 맞춰야 한다. 동시에 기장의 성희롱에도 대처해야 한다(4회). 기내 면세품 판매실적까지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못하고 달성해야 하는 평화의 노동강도와 스트레스는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업무를 맡고 있고 평화보다 직급이 낮은 남성 승무원 로운(김재원 분)은 다르다. 승객들은 그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지도 않고, 진상 상사도 로운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 평화는 고객과 상사 모두를 향한 감정노동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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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감정노동을 하며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세 여성은 그런데도 자신의 일상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건 셋의 우정 덕분일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날. 셋은 함께 모여 수다를 떨고 맥주를 한잔 마시고, 한바탕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스트레스를 날려 버린다. 그리고 솔직한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며 서로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응원해준다. 이런 숨 쉴 구멍이 있기에 이 세 여성은 부당한 감정노동을 하면서도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 테다.
사실 사랑, 다을, 평화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여성들은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취미가 우선인 전 남자친구에게 "나한테 미안해서 더 이상은 못 만나겠다"고 말하며 이별을 통보할 만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여성이고, 다을은 일터에서의 불평등을 알아차리고 이를 바로잡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평화 역시 추근대는 기장에게 "넌 아직도 내가 우습니?"라고 받아칠 강단이 있는 여성이다. 이런 이들조차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직장에서 또는 가부장적인 가정문화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 섞인 감정노동이다.
<킹더랜드>의 인물들은 이처럼 '백마 탄 왕자님' 클리셰 사이사이 감정노동의 부당한 현실을 촘촘히 보여주고 있다. 이에 우리의 현실을 비춰보고 함께 논의해 볼 수 있다면 <킹더랜드>를 시청하는 시간이 조금 더 의미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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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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