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ge]차가운 쇠창살 속에도 꽃은 피어날지니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며 강한 여운 남겨
"물컵보다 조금 작은 비닐 화분에 떠온 팬지꽃 한 포기를 얻어 작업장 창턱에 올려놓았습니다."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1941~2016)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글이다. 신영복 교수는 20여년 복역했다. 수감 중에는 꽃을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 어쩌다 얻은 팬지꽃 한 포기가 얼마나 소중했을까. 그러니 고이 창턱에 모셔놓았을 터.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 중인 '겟팅아웃'의 마지막 장면은 신영복 교수가 창턱에 올려놓은 화분을 떠올리게 한다. 감옥을 상징하는 쇠창살과 꽃이 담긴 화분의 대조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소한 젊은 여성 알린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겟팅아웃 무대의 왼쪽 절반은 쇠창살로 채워져 있다. 극이 끝나면 암전이 되면서 왼쪽 무대를 채운 쇠창살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오른쪽 무대 끝 창턱에 놓인 꽃이 담긴 화분이 핀조명을 받으며 홀로 빛난다. 알린에게 닥친 수많은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연극에서 마지막 희망을 소망하는 끝맺음이다.
알린은 8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이제 막 출소했다. 그의 과거 이름은 알리. 사기와 매춘에 살인까지, 온갖 일탈과 범죄를 일삼았다. 알리는 출소하면 새 삶을 살겠다며 이름을 알린으로 바꿨다. 극은 알린이 출소한 첫날의 모습을 그린다. 알린이 새 삶을 시작하는 허름한 아파트에 교도관 베니, 알린의 엄마, 알린의 옛 남자친구 칼, 윗집에 사는 이웃 루비가 잇달아 방문하고 이들이 알린과 나누는 대화가 극을 이루는 뼈대다.
알린은 희망을 갖고 출소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알린을 방문하는 인물을 통해 여전히 시련에 직면할 알린의 현실이 드러난다.
알린을 새 보금자리인 낡은 아파트에 데려다준 교도관 베니는 알린에게 같이 살자며 흑심을 드러낸다. 엄마는 출소한 딸을 환대하기는커녕 냉정한 모습을 보인다. 알린이 수감 생활 중 낳은 딸 조이를 데려와 같이 살겠다는데 엄마는 반대한다. 알린이 애를 키울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범죄자인 알린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뿐이다. 옛 남자친구이자 포주였던 칼은 돈을 벌려면 다시 매춘을 해야 한다고 알린을 꼬드긴다. 윗집에 사는 여자 루비는 과거 알린처럼 죄를 짓고 복역했던 인물. 그나마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알린의 처지를 이해해준다.
알린은 자신의 방 창문을 화분으로 가리고 싶어 한다. 창문을 둘러싼 쇠창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도둑이나 강도의 침입을 막아 알린을 보호하기 위한 방범창이지만, 알린에게는 자신을 가두었던 감옥이 연상되는 쇠창살일 뿐이다.
겟팅아웃은 알린과 알리가 한 무대에 동시에 등장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 편집돼 상영되는 영화처럼, 알리와 알린이 무대에 교대로 등장하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뒤섞여 극이 전개된다. 무대도 2개 공간으로 나뉜다. 무대 오른쪽은 1층의 허름한 아파트와 2층의 감옥으로 나뉜다. 1층은 현재의 알린이, 2층은 과거의 알리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다만 알리는 자주 1층 알린의 허름한 아파트 공간에 침입한다. 알린이 종종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때다. 알린은 일리가 자신의 아파트에 등장할 때마다 알리를 감추고 숨기려 한다. 지우고 싶은 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지우고 싶고, 현재와 미래는 절망적이기에 공연 내내 알린은 표정이 굳어있고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알린은 단 한 번 미소를 보인다.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과거의 자신인 알리와 화해를 통해 알린은 비로소 미소를 되찾는다. 알리를 거부하기만 하던,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알린이 비로소 알리를 품으면서 냉혹한 현실을 헤쳐나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내내 우울하던 극은 마지막에 가서야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며 마무리된다. 쇠창살을 가리는 화분에 핀조명을 비추며 끝맺음하는 이유도 희망에 대한 상징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극은 어떤 의미에서 단조로운 인상을 준다. 갓 출소한 여성의 이야기라는 극의 가장 큰 사건은 극 초반부에 이미 드러나고 이후 이렇다 할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극은 연극적 흥미를 불러오고, 마지막에 한 뼘 성장한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강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고선웅 연출도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 연극이라고 평했다. 그는 "겟팅아웃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본 것이 20년 정도 된 것 같다"며 "그 때 맨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고 좋았다"고 했다.
알린을 연기한 배우 이경미씨는 이번 작품이 자신이 했던 공연 중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공연이라고 했다. 다만 극의 마지막에 알린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고 말했다. "제가 봤을 때 알린은 또 고난과 역경 속에 살아야 할 텐데 여태 겪었던 고난보다는 더 힘든 일은 없을 것 같다. 아주 행복하게 잘 또 견뎌내지 않을까. 알린이 앞으로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 달에 150만원 줄게"…딸뻘 편의점 알바에 치근덕댄 중년남 - 아시아경제
- 버거킹이 광고했던 34일…와퍼는 실제 어떻게 변했나 - 아시아경제
- "돈 많아도 한남동 안살아"…연예인만 100명 산다는 김구라 신혼집 어디? - 아시아경제
- "일부러 저러는 건가"…짧은 치마 입고 택시 타더니 벌러덩 - 아시아경제
- 장난감 사진에 알몸 비쳐…최현욱, SNS 올렸다가 '화들짝' - 아시아경제
- "10년간 손 안 씻어", "세균 존재 안해"…美 국방 내정자 과거 발언 - 아시아경제
- "무료나눔 옷장 가져간다던 커플, 다 부수고 주차장에 버리고 가" - 아시아경제
- "핸들 작고 승차감 별로"…지드래곤 탄 트럭에 안정환 부인 솔직리뷰 - 아시아경제
- 진정시키려고 뺨을 때려?…8살 태권소녀 때린 아버지 '뭇매' - 아시아경제
- '초가공식품' 패푸·탄산음료…애한테 이만큼 위험하다니 - 아시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