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프랑스 남자가 찾아왔다, 한국 와인이 궁금하다고 [소설가 신이현의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소설가 신이현이 충북 충주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양조장을 만들었습니다. 와인만큼이나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그가 달콤하게 와인 익어가는 냄새가 나는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편집자말>
[신이현(작가)]
실뱅. 파리에 사는 프랑스 남자가 우리 양조장에 왔다. 매일 아침 그는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수주팔봉까지 갔다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온다. 땀에 푹 젖어 헥헥거리며 욕실로 가 샤워를 하고 반짝반짝하는 모습으로 나와 아침을 먹는다. 빵에 버터를 듬뿍 바르고 잼을 얹어서 뜨거운 커피에 푹 담근다. 검은 커피에 버터와 잼이 둥둥 떠다니면서 지저분하지만 맛있게 먹는다. 작은 차 스푼으로 떠다니는 버터와 잼 덩어리를 떠서 냠냠 먹는다.
▲ "킁킁" 프랑스 태생 두 남자가 이역만리 땅에서 만나 풀 냄새를 맡고 다닌다. |
ⓒ 신이현 |
"딱총나무는 왜 심었지?" 실뱅이 이렇게 질문하면 두 사람은 딱총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살피고, 꽃을 보고, 향을 맡고 몇 십분이고 끝없이 흘러간다. 그러다 옆에 있는 다른 식물을 보고는 잎사귀를 뜯어서 냄새를 맡고 "와, 이건 정말 향이 독특하네!"라고 말하면 레돔은 그것이 무엇이며 왜 심었는지 이야기를 한다.
실뱅은 핸드폰으로 식물을 찍고 뭔가를 적는다. "컴프리가 정말 많네. 그냥 저절로 난 거야?" 실뱅의 질문은 끝이 없다. "이 밭에 저절로 난 건 거의 없어. 모두 부러 심은 거야. 이 컴프리는 땅의 광부라고들 해. 땅 속의 미네랄을 빨아 당겨서 나중에 스스로 퇴비가 되는 정말 좋은 식물이야!" 포도밭에 들어가기도 전에 온갖 식물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그 쓰임새를 말하다가 하루가 다 갈 것 같다.
겨우 포도밭에 들어가서 이제 일을 시작하나보다 하고 보면 또 이야기다. "이 한국포도나무들의 품종은 뭐지? 캠벨과 청수, 머루와 청향.... 프랑스 품종과는 완전 다르구나. 높이도 다르고, 외래종과 접목한 품종이 많은데 와인 맛이 정말 궁금하네. 한국의 병충해는 프랑스와는 다르겠지? 여기도 지역마다 포도나무 가지치기에 대한 규제가 있어? 포도나무를 자유롭게 심을 수 있다고? 잡풀 관리는 어떻게 해? 포도밭 사이에 이 호밀은 왜 심었지? 포도나무 사이사이에 다른 나무들이 정말 많네.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
▲ 풀도 좋고 와인도 좋아 둘 다 코 박고 냄새 맡는 데 선수다. |
ⓒ 신이현 |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은 오랜 친구나 형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모르는 사이다. 실뱅의 원래 직업은 멀티미디어 엔지니어인데 농사를 짓고 와인 메이커가 되려고 한다고 했다. 부르고뉴 농업학교에서 포도재배와 양조학을 공부를 마치고 실습을 해야 하는데 우리 농장에서 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 이제 우리 양조장이 프랑스 남자가 실습하러 올 정도가 된 거야? 오우 레돔씨, 대단하다." 프랑스에서 와인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부르고뉴 태생의 남자가 한국 시골의 작은 양조장에 실습을 하러 오겠다니 신기했다.
몇 해 전부터 실뱅은 파리 소르본느 대학과 한국의 한 대학에서 멀티미디어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교환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책임자로 일하고 있어 1년에 몇 달씩 한국에 온다고 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이곳에는 어떤 포도가 있으며 어떤 와인을 만드는지 궁금해서 살펴보던 중 우리 양조장 '레돔'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앗, 프랑스 남자가 한국에서 농사짓고 와인을 만드네. 그것도 파머컬처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내추럴 와인을 만든다고? 만나봐야겠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만났다. 이국만리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형제가 되어버린다는 뜻이었다.
레돔은 모든 것을 말했다. 포도밭에 자라는 딸기와 컴프리, 호밀과 토끼풀, 지렁이와 같은 작은 것들에서부터 헤이즐럿 나무와 보리수나무, 체리나무 같은 커다란 것들까지, 한국에서 농사짓고 와인 만들었던 6년 세월의 경험을 세세히 이야기 하려니 하루해가 짧았다. 레돔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귀담아 듣는 사람을 만났고, 미래의 동료에게 모든 것을 전해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두 남자는 포도밭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몰랐다.
특히 두 남자는 향에 집착했다. "이 향기는 뭐랄까, 콕 쏘면서도 부드럽게 남아있는 덜 익은 밀 냄새 같은 것이 낡은 옛 사진을 보는 느낌이랄까." 비벼서 코에도 대보고, 입에 넣어 씹어보기도 했다. 포도밭 고랑을 돌아보며 앉았다 섰다 허리를 구부렸다 멈췄다 하면서 걸어가는 두 남자를 보니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의 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배회하던 한 청년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르고뉴 양조장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세 형제는 포도밭에서 수확할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가를 알기 위해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씨앗을 먹어보고 동서남북 다른 쪽 포도를 먹어보고, 볕이 잘 드는 쪽 안 드는 쪽 포도도 먹어보며 예민하게 감각을 세운다. 언제 수확하느냐에 따라 와인의 성격이 너무나 달라지기 때문에 형제들은 사흘 뒤냐 일주일 뒤냐를 두고 격렬하게 논의한다.
▲ 프랑스 최고의 와인 산지 부르고뉴에서 온 실뱅. |
ⓒ 신이현 |
부르고뉴에서 온 남자 실뱅은 영화 속 형제들처럼 태어나면서 포도밭을 보아왔고 술 익는 냄새를 맡으며 와인을 마셔왔다. 한 잔의 와인이 땅에서 왔고 그 들판의 태양과 바람, 습기와 농부의 예민한 감각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 밭에 와서 땅과 나무를 보는 태도가 남달랐다.
그렇지만 농부가 되려고 나이 오십에 괜찮아 보이는 직장을 떠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와인에 대한 열정이라고 할까. 그리고 파리라는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 자연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마음.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포도농사로 이어진 것 같아." 레돔이 직장을 그만 두고 농부가 되어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와 다르지 않는 답이었다. 그때 농업학교에 함께 다녔던 마흔 넘은 늙은 학생들도 거의 비슷했다.
대단한 목적보다는 그냥 지금 다니는 직장을 떠나고 싶고, 농사를 지어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은 없었다. 포도밭을 살 돈도 양조장을 차릴 돈도 없다. 그래서 같은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천리만리 떨어진 곳이라도 그곳에서 자기 꿈의 씨앗을 뿌리고 사는 동료를 만나러 갔다.
시작은 심플하지만 열정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지역의 포도밭에서 몇 년 일을 하고, 근처에 작은 땅을 살 기회가 생기고, 그렇게 해서 포도나무를 심고, 다시 몇 년이 흘러 포도를 수확해서 자신의 와인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 행복해?" 하고 물으면 다들 그냥 어깨를 으쓱 했다. "그런대로 괜찮아." 그런 뜻이었다.
▲ 말 많은 부르고뉴 남자와 알자스 남자의 밤은 참 길다. |
ⓒ 신이현 |
부르고뉴적인 느낌으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엔 포도 나뭇가지를 태운 불에 고등어를 구워서 청수 청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냈다. "아, 이 고등어에 밴 포도나무 냄새가 너무 좋아. 거기에 한국 청포도 청수 화이트 와인이라니, 이 와인은 정말 놀랍군. 상큼한 레몬향이 나는가 하면 바다의 짭쪼롬한 맛이 은은하게 올라와. 바다에 온 것 같아. 너무 좋아." 식사가 끝나고도 이야기는 끝이 없고 나는 잠이 쏟아져 매일 밤 먼저 잠들어버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또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밀크커피를 준비하고 버터와 빵, 잼을 내놓으며 한마디 한다.
▲ "실뱅, 너의 제2의 인생에 건투를 빌어" |
ⓒ 신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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