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출산 앞두고 사라져버린 남편
[조영준 기자]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출산을 앞두고>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출산을 앞두고>
미국 / 2023 / 14분
감독: 한나 방
벤(테디 리 분)과 라일라(캐서리 고 분) 부부는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아이를 만날 생각에 기대와 행복을 함께 느끼는 엄마 라일라와 달리 아빠 벤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오히려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는 아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자신들의 아이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 말하는 남자와 그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여자. 두 사람은 축복과도 같은 아이의 탄생을 앞두고 왜 이렇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나 방 감독의 영화 <출산을 앞두고>는 제목 그대로 출산을 앞둔 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완전히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동일한 상황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개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극적인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준비된 장치는 시대적 배경이다. 정확히 언제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나 길어지는 폭염과 극심한 가뭄,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며 인류의 안전한 삶이 위협받는 상황이 제시된다. 어려운 상황 앞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태도. 영화는 이 상반된 장면을 통해 선택이라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개인의 선택이 오롯이 개인의 결과만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한다.
"뭐가 됐든 간에 같이 헤쳐나가면 돼"
벤의 말처럼 자신들은 물론 이제 막 태어날 아이의 생존 역시 위협을 받을 수 있기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 하지만 반대로 라일라의 말처럼 마냥 걱정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 와서 만삭에 가까운 이 아이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문제는 이 상황에 대한 벤의 불안이 점차 거대해진다는 것이다. 이제 세상의 문제는 그의 상상을 타고 현관문을 넘어 들어온다. 아들이 쓸 침대를 직접 만들던 그의 망치질 사이사이로 꼭 세상의 멸망을 암시하는 듯한 다양한 몽타주들이 그의 불안처럼 새겨진다.
영화는 시종일관 불안에 휩싸여 걱정뿐인 남자의 모습을 시청각적인 자극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표현해 낸다. 관객의 불안을 유발하기 위한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와 라디오를 통해 쏟아지는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이 담긴 뉴스. 이에 자신의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벤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있으면 굳이 특별한 장치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같은 수준의 불안이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가족의 믿음직한 자리가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벤은 끝내 자신의 자리조차 지키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영화의 시작부터 조금씩 모습을 키워가던 짙은 어둠의 포털 속으로 몸을 던지고 마는 것이다. 남편이 결국 자신의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는 영화적 표현에 가까운 장면이리라. 이제 만삭인 아내 라일라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남편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채 완성하지 못한 아들의 침대뿐이다.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68.415>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68.415>
이탈리아 / 2022 / 20분
감독: 안토넬라 사바티노, 스테파노 블라시
줄리아는 지금 '지글 클리닉'이라는 이름의 의료원 입소를 앞두고 있다. 어떤 이유로 내린 결정인지에 대해서 영화는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지만, 이 클리닉의 입소를 위해서는 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듯 보인다. 검사 결과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일련의 수술 과정과 4주간의 재활 및 적응 기간을 보낸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줄리아 본인이 입소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입소와 정해진 수술 절차가 끝나고 클리닉이 시작된 첫날, 줄리아를 포함한 입소자들은 마르코라는 이름의 또 다른 입소자 한 명을 만나게 된다. 그는 먼저 입소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수료한 사람으로 내일이면 퇴소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클리닉 관계자의 소개에 따라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모두 행복했다고 말하는 남자. 하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화감을 감출 수가 없다. 이제 입소자들이 4주의 기간 동안 해야 하는 일이라고는 클리닉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 일뿐이다. 배부르고 맛있게 먹는 사람들 속에서 어쩐지 홀로 망설이는 줄리아. 자신 앞에 놓인 머핀이 너무 진짜 같아서 먹을 수가 없다는 이상한 말만 남기고 삼키지 못한다.
다큐멘터리 감독과 작가로서 경력을 쌓아온 이탈리아의 두 감독 안토넬라 사바티노와 스테파노 블라시의 영화 < 68.415 >는 전 지구가 플라스틱으로 인해 오염된 미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바다와 해변은 물론, 숲과 도시까지도 모두 지난 세대부터 축적되어 온 플라스틱 쓰레기로 뒤덮인 시대를 배경으로 정체가 감춰진 클리닉과 그곳에 입소한 줄리아의 모습을 따른다. 현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환경오염과 플라스틱 과용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함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숫자 68.415가 의미하는 바는 현 세대가 한평생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먹게 되는 미세플라스틱의 양이라고 한다. 두 감독은 '에든버러 헤리엇와트 대학'의 논문에 실린 이 사실을 바탕으로 촬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이들에게 주어진 음식은 진짜 음식이 아니라 재가공된 페트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고기와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파스타, 소스는 폴리염화비닐로 만들고 빵과 디저트는 폴리스티렌이라는 플라스틱 물질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이 클리닉에 입소해 절차에 따라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오래된 페트를 가공한 이 음식들을 먹을 수가 있게 된다는 설정이다. 물론 이들 재료는 모두 원래 인체에는 치명적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봐서는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음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소하게 되는 것이므로 극 중 줄리아의 모습처럼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줄리아도 마음을 바꿔 음식을 먹게 된다. 처음 삼킨 플라스틱 머핀의 맛이 그 모양처럼 더할 나위 없이 맛있기 때문이다.
흐름에 필요하지 않은 장면들을 과감하게 쳐내고 메시지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영화의 속도가 이 작품이 무엇을 위해 완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입소자들이 겪게 될 과정이나 음식이 제조되는 장면, 반복되는 4주의 시간 등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깔끔한 느낌을 받는다. 아무 의식 없이 그 과정에 동화되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홀로 망설이는 모습의 주인공 역시 도드라지는 부분이 있다. 충격적인 사실을 건조하게 설명하는 영화의 톤까지 이 작품이 보여주는 모든 장면은 후반부의 충격적인 장면과 메시지를 위해 존재한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선택된 자들이라고 이제 막 수술을 받고 나온 입소자들에게 클리닉의 관계자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 말이 의미하는 진짜 의미가 그려진다. 기괴하면서도 섬뜩한 모습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들이 반복해서 외치던 구호가 어떤 뜻이었는지 조금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이보다 더 강한 경고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다 먹으면 세상이 깨끗해진다.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은 사람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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