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부산' 유치나선 韓 엑스포 참가史…파리 엑스포 때 클림트 그림 대상 받아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 '직지' 처음 전시
구스타브 클림트, 앤디 워홀 활약도
2030 엑스포 유치전이 뜨겁다. 대한민국 부산이냐,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냐? 부산은 초반에 ‘오일 머니’를 앞세운 사우디아라비아의 거친 공세에 밀려 고전하다가 현재는 바짝 따라붙는 형세라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얼마 전 파리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 제목이 ‘Gateway to Eurasia’였다. 유라시아의 관문!
에펠탑은 1889년 파리엑스포 때 탄생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엑스포에서 주탑(主塔)으로 세웠다. 다른 파빌론들처럼 20년 뒤에 철거한다는 조건으로 세워진 게 에펠탑이다.
세계 3대 메가 이벤트는 FIFA 월드컵, 동·하계올림픽, 엑스포다. 3대 메가 이벤트를 개최한 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선진강국이다. 그런데 동·하계올림픽은 생각만큼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스토리텔링의 이벤트는 월드컵과 엑스포다.
한국이 만국박람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1893년 시카고 엑스포다. 두번째가 1900년 파리엑스포다. ‘샹 드 마르’ 지역을 포함해 센강 주변에서 열린 1900년 파리엑스포에는 세계 41개국이 참가했다. 이중 아시아는 중국, 일본, 시암(태국), 조선 4개국. 대관람차, 유성영화, 에스컬레이터, 디젤엔진, 텔레그라폰 등이 파리엑스포에서 처음 나왔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문명의 이기(利器)가 120여년 전 파리에서 세상 빛을 봤다. 7개월 동안 4800만명 이상이 박람회장을 다녀갔다.
1900년이면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 자리에 있을 때다. 국제정세에 캄캄했던 고종은 어떻게 파리엑스포 참가를 결정했을까. 탁월한 외교관이던 주한 프랑스 공사 대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in de Plancy)의 설득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플랑시는 외교관 생활 30년을 모두 중국·일본·조선에서 보냈다. 1896년 조선 상주 프랑스 영사로 발령받기 전까지 중국과 일본에서 외교관 경험을 쌓았다. 당시 한양의 외교가(街)는 정동길이었다. 정동길에 영국공사관, 미국공사관, 독일공사관, 프랑스공사관, 러시아공사관이 자리 잡았다. 조선인들은 프랑스를 법국(法國), 독일을 덕국(德國)으로 불렀다. 법국 공사관은 정동길 이화여고 옆 현 창덕여중 자리에 있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읽을 줄 알았고 동양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플랑시는 조선 서지(書誌)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의 서지를 수집하던 중 우연히 어떤 조선인으로부터 ‘직지(直指)’를 소개받는다. 그는 ‘직지’를 고가에 매입했다. 그는 ‘직지’의 가치를 알아본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그의 안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0년 파리엑스포에 ‘직지’를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주프랑스 공사 이범진과 함께 파리엑스포장에 한옥을 설치해 직지를 비롯한 조선의 공예품이 전시되도록 힘을 썼다.
4800만명이 찾았다는 1900 파리엑스포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조선의 파빌론을 찾았을까. 극소수의 사람만이 한옥 전시관에서 1377년에 인쇄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보았을 것이다. ‘직지’는 1900 파리엑스포에서 이렇게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클림트, 파리엑스포에서 그랑프리 수상
1900 파리엑스포는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에게도 잊지 못할 만국박람회다. 클림트의 화가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가 빈대학 학부화(學部畵) 스캔들이다.
빈대학은 환상(環狀)도로 안쪽 구시가의 중심인 슈테판 성당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늘어나고 강의동이 부족해지면서 넓은 공간으로 옮길 필요성이 커졌다. 빈대학 측은 장소를 물색하다가 요새 성곽이 헐린 빈터에 대학 건물을 신축하기로 한다.
교육부는 1894년 신축하는 대학 강당에 철학부·법학부·의학부·신학부 학부화를 내걸기로 한다. 그러면서 한창 떠오르는 스타 화가인 클림트와 프란츠 마치에게 학부화를 의뢰한다. 구스타브는 철학·법학·신학부 학부화를, 마치는 신학부 학부화를 각각 그리기로 하고 그림값을 받았다.
클림트는 먼저 ‘철학 알레고리’를 그렸고, 이를 1900년 분리파회관에 전시했다. ‘철학’이 나오자마자 빈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교육부, 정치권, 언론이 동시에 들고일어났다. “무슨 철학 그림이 저러냐?” “클림트가 완전히 정신 나갔다”
교육부가 클림트에게 제시한 주제는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였다. 하지만 클림트는 철학 알레고리를 구상하면서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한 폭의 그림에 표현했다. 갓난아기, 어린이, 근육질의 청년, 육감적인 나부 …. 피골상접한 노인이 뒤엉켜 어디론가 흘러가는 모습. 얼핏 보면 괴기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면 클림트의 메시지가 읽힌다.
교육부와 언론이 비난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철학부 그림’ 하면 플라톤이 나오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림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다. 플라톤의 이원론(二元論)이 그림으로 재현되기를 기대했으리라. 주제를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라고 했으니까.
클림트는 생각이 달랐다. 인간의 철학적 사유는 죽음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천재 클림트는 철학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의 고정관념에 갇혀 있던 범재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천재를 마음껏 경멸했다.
빈 사회를 들끓게 했던 ‘철학’ 그림이 바로 1900 파리엑스포에 출품되었다. 빈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철학’은 파리엑스포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미술에 있어서 파리와 빈은 그만큼 격차가 있었다. 1900년 파리엑스포 그랑프리로 화가의 명예가 조금은 회복되었다.
뒤이어 완성한 ‘법학’과 ‘의학’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빈대학은 끝내 클림트의 학부화 게시를 거부했다.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받은 그림값을 되돌려주었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클림트는 결심한다. 다시는 정부 발주 그림을 그리지 않겠노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리들과 상대하지 않겠노라. 이후 클림트는 귀족 초상화와 풍경화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통조림
1962년 뉴욕은 팝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가 막 꽃을 피우던 시점이었다. 제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팝아트의 선두주자로 주목을 받았다. 뉴욕에서 상업미술로 밥벌이를 하던 피츠버그 출신 앤디 워홀은 팝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에 끌렸다. 무엇을 그려야 팝아트에서 인정받을까.
그때 신생 화랑의 여성 큐레이터가 워홀을 찾아왔다. 신생 화랑은 덜 알려진 작가의 발굴이 필요했다. 큐레이터는 워홀에게 지폐나 통조림을 그려보는 게 어떻겠느냐. 워홀은 어머니 줄리아에게 통조림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줄리아는 많이 팔리는 캠벨 수프 통조림 32종을 사 왔다. 워홀은 캠벨 통조림 초상화를 하나씩 그려 나갔다. 팝아트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통조림, 청바지, 햄버거, 콜라….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통조림과 청바지는 서부 개척 시대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통조림의 대표가 캠벨 수프 통조림이다. 1869년 조셉 캠벨이 뉴저지주 캠든에 토마토, 야채 가공유통회사를 창립했다.
캠벨 수프가 미국 통조림 시장을 제패한 터닝포인트는 과학기술이었다. MIT와 독일 괴팅엔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임원이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그전까지 캠벨 수프의 단점은 내용물보다 물의 양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수분이 통조림의 무게를 나가게 해 유통에 지장을 주었다. 화학자 임원이 통조림에 들어가는 물의 양을 절반으로 줄이고 내용물을 응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통조림 제조에 혁신이 일어났다. 미국인은 아침저녁으로 캠벨 수프 통조림을 찾았다.
이 통조림이 바로 1900 파리엑스포에 참가했다. 유럽 관람객들은 자동차의 디젤엔진 못지않게 캠벨 수프 통조림에 관심을 보였다. ‘미국 사람들은 이런 걸 매일 먹는다고 하네’ 관람객들은 신기한 듯 통조림을 살펴보았고, 맛을 보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워홀이 팝아티스트로 인정받은 것이 캠벨 수프 통조림이다.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물었다.
-왜 통조림 초상화를 그렸느냐?
“20년 동안 통조림 수프를 점심으로 먹어왔으니까요.”
캠벨 수프 통조림은 최적의 팝아트 소재였다.
2030 엑스포가 부산에서 열리게 된다면 과연 어떤 첨단제품이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인가.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 달에 150만원 줄게"…딸뻘 편의점 알바에 치근덕댄 중년남 - 아시아경제
- 버거킹이 광고했던 34일…와퍼는 실제 어떻게 변했나 - 아시아경제
- "돈 많아도 한남동 안살아"…연예인만 100명 산다는 김구라 신혼집 어디? - 아시아경제
- "일부러 저러는 건가"…짧은 치마 입고 택시 타더니 벌러덩 - 아시아경제
- 장난감 사진에 알몸 비쳐…최현욱, SNS 올렸다가 '화들짝' - 아시아경제
- "10년간 손 안 씻어", "세균 존재 안해"…美 국방 내정자 과거 발언 - 아시아경제
- "무료나눔 옷장 가져간다던 커플, 다 부수고 주차장에 버리고 가" - 아시아경제
- "핸들 작고 승차감 별로"…지드래곤 탄 트럭에 안정환 부인 솔직리뷰 - 아시아경제
- 진정시키려고 뺨을 때려?…8살 태권소녀 때린 아버지 '뭇매' - 아시아경제
- '초가공식품' 패푸·탄산음료…애한테 이만큼 위험하다니 - 아시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