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 없는 수능’ 이번엔 풀릴까
EBS 연계 높이니 ‘킬러’ 등장… 문·이과 합치니 N수생 양산
윤석열 대통령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을 뺀 ‘공정 수능’을 주문한 이후 입시 현장은 오는 9월 6일로 예정된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모의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킬러문항 없이 교과과정 내에서 출제된다는 수능이 과연 상위권 변별력 기능이 있을지 평가받는 첫 무대다. 그때까지의 수험생들 혼란은 정부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엄연한 현실이다.
수험생들은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아 문제풀이 기술을 익힌 학생에게 유리한 문항’이란 킬러문항에 대한 모호한 수준의 정의만 손에 받아든 상태다. 정부는 킬러문항이 아닌 고난도 문항에 대한 예시도 아직 제시하지 않았다. 수능을 넉 달 남겨놓은 수험생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정책이 불쑥 던져진 타이밍에 대한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윤 대통령의 킬러문항에 대한 문제 인식 자체는 타당하다는 평가가 많다. 수능이 사교육 접근성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불공정 게임’이란 정황이 짙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교육이 활성화된 특정 지역과 수능 고득점자 분포가 일치한다는 통계는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수능 불공정성의 한복판에 킬러문항이 존재해왔다. 의대나 서울대 등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킬러문항의 경우 공교육으로 준비하기에 어렵다는 비판이었다. 킬러문항 출제는 상위권 수험생들을 줄 세우려면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교육부와 평가원이 묵인해온 잘못된 관행이었다. 대통령이 이를 정조준한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간 정부가 대입에 손을 댈 때면 언제나 그럴듯한 목표가 제시됐다. 수험생 부담 경감, 융합형 인재 양성, 고교 교육 정상화 등 다양한 명분이 걸렸지만, 다만 예외 없이 크게 두 가지 부작용에 직면해야 했다. 입시 현장 불확실성 증대로 인한 사교육 증가, 정부가 손을 댄 다른 영역에서 사교육이 늘어나는 이른바 ‘풍선효과’가 그것이다. 사교육은 여전히 단단한 학벌사회 구조와 그 속에 진입하려는 경쟁 압력을 자양분으로 ‘불패 신화’를 써왔다. 킬러문항 역시 섣부른 대입 정책 변경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번에는 풍선효과를 억제하면서 킬러문항만 ‘핀셋 제거’할 수 있을까.
입시 전문가들은 킬러문항 등장의 시발점을 EBS 연계율이 70%까지 올라간 2011학년도로 본다. EBS 연계 정책은 수능 사교육비를 잡고, 전국의 모든 수험생에게 공평한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다. 이후 고교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준다며 교육과정과 수능 시험 범위, 문항 수를 축소하는 정책도 병행됐다. 하지만 수능은 기본적으로 등급과 표준점수, 백분위 점수로 수험생 석차를 매기는 변별력 도구다. 학습 부담 감소와 사교육비 경감이란 정책 목표와 변별력 확보라는 현실이 충돌하자 교사와 교수조차 풀기 어려운 킬러문항이란 몬스터가 탄생하게 됐다.
킬러문항이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시점은 2019학년도였다. 만유인력을 다룬 국어 31번이 지나치게 어려워 당시 평가원장이 사과했다. 국어 비문학 난도 상승은 2018학년도부터 시작된 수능 영어 절대평가의 부작용이었다. 당시 정부는 영어에서 1점을 높이기 위해 사교육을 받는 상황은 비정상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국어와 수학은 상대평가, 영어는 절대평가라는 기형적인 시험이 만들어졌다. 당시 국어는 입시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난도가 쑥 올라갔다. 2019학년도 국어의 표준점수 최고점(원점수 만점자 점수)은 역대 최고인 150점까지 치솟았다. 역대 가장 어려웠다는 것이다. 킬러문항이 논란이 되자 출제 당국은 킬러문항을 줄이고 난도를 조금 낮춘 준킬러문항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상위권 수험생들의 체감 난도가 올라가고 다시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문·이과 통합 수능은 이른바 ‘문과 침공’(이과생들의 문과 상위권 대학 지원)과 ‘n수생 증가’라는 역효과를 낳았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창의성을 갖춘 ‘잡스형’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문·이과 통합이 추진됐다. 박근혜정부에서 교육과정이, 문재인정부에서 대입 정책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수학에서 문·이과 경계를 허물자 대입에서 이과생이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교육부는 “조정점수가 있어 (문과생이 주로 선택하는) 확률과통계 선택자가 불리하지 않다”고 장담했었지만, 이는 ‘허언’으로 드러나고 있다. 문·이과 통합수능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로 인한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 40% 정책, 6년제 약대 부활 등과 맞물려 n수생을 늘린 것으로 분석된다. 재수 전문, 수능 모의고사 업체엔 호재였다.
이처럼 대입은 복잡하게 얽힌 ‘고차 방정식’이다. 하나만 고쳐도 여러 갈래로 연쇄 반응이 나타난다. 킬러문항 제거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먼저 압박을 느낀 출제 당국이 결국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물수능’이 될 경우 한 문항만 틀려도 2, 3등급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상위권 수험생의 혼란은 중상위권 이하 수험생에게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수시 6회, 정시 3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논술이나 면접 등 대학별고사 난도가 높아지고 재수생이 증가할 수 있다.
입시 전문가들의 관측대로 출제 당국이 준킬러문항을 다수 배치하는 방식으로 변별력을 확보했을 경우에도 입시 현장은 출렁일 수 있다. 이미 ‘킬러문항이 없다면 재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n수생, 반수생이 늘어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고2 이하 문과생들 사이에선 이과생이 치르는 미적분·기하로 선택과목을 변경하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 공교육이 수능을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런 변화는 결국 사교육비 증가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게 입시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한 입시 전문가는 “킬러문항 배제뿐 아니라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2028학년도부터 내신 산출 방식이 바뀌는 등 대입에서 상당한 변화가 예고된 상태”라며 “정부가 입시 사교육비를 잡으려면 불확실성을 줄여 학생·학부모의 불안감을 낮춰야 하는데 아직 뾰족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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