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길고 슬픈 엔딩 '4.3 다큐' [수산봉수 제주살이]

이봉수 2023. 7. 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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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봉수 제주살이] 제1회 4.3영화제, 6개월 장정 시작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숫자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야 하는 이유

영화가 끝나도 불이 들어오지 않고 끝없이 자막이 올라간다. 제주4.3 1만5000여 희생자 명단이 안치환의 장중한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를 배경으로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16분. 영화의 파격이 끔찍함과 슬픔으로 이어져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나?' 진정한 추모는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를 알겠다.
 
▲ 4.3 희생자 명단이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4.3희생자 가운데 명단이 확인된 1만5000여 명의 자막이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를 배경으로 16분 동안 올라간다. ⓒ 김동만

  
6월 30일과 7월 1일 이틀 연속, 성산에서 왕복 2시간 걸리는 제주시내로 가서 영화 네 편을 봤다. 제1회 4.3영화제가 제주에서 개막돼 6개월간 매월 마지막 금·토요일마다 3~4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육지 강연 일정 등이 없을 때는 모두 보려고 한다.

첫날(6월 30일)은 개막식에서 '4.3과평화 영상공모전' 대상 작품인 박예슬의 <당신에게도 또 다른 제주4.3이 있지 않을까요>에 이어 김동만 감독의 <잠들 수 없는 함성 4.3항쟁>(1995)과 <유언>(2006)이 상영됐다. 김동만의 두 다큐 영화는 일본과 미국 두 제국주의 지배에서부터 4.3봉기와 대학살, 살아남은 자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현대사를 생존자 인터뷰와 내레이션, 강요배 화백의 4.3연작으로 가감없이 복원해낸다.

'언어절의 참사'를 실감나게 묘사한 영상

국가폭력에 의해 가족을 학살당하고도 입조차 뻥끗하지 못한 제주민의 한을 세상에 글로 전한 것이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1978)이라면, 17년 뒤 영상으로 전한 이는 당시 20대 열혈 청년이던 김동만이라 할 수 있다.

현기영은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와 '작가의 말'에서 "(4.3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의 참사"라고 썼다.

"인간이 사용해온 언어로는 그 참사를 설명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어떤 악행도 그 악행에 필적할 수 없기에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영상은 언어절을 대신해 더 실감나게 참사를 묘사할 수 있다. 김동만이 이끄는 '4.3다큐멘터리제작단'의 영상은 제주4.3을 전국적으로 이슈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작단은 4.3의 진실을 다큐로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복사본을 만들어 대학가에 뿌렸다. 현재 제주한라대 교수인 김동만은 영화가 끝난 뒤 '감독과의 대화'에서 "당시 제주대 총학생회가 큰 역할을 했다"며 "비디오테이프 재생기계 서너 대를 계속 돌리면서 테이프 300개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 김동만 감독과의 대화 김동만(왼쪽) 감독과 이정원 4.3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감독과의 대화’에서 4.3영화제가 제주를 대표하는 평화-인권 영화제가 되기를 희망했다.
ⓒ 양나운
 
1979년 현기영에 이어 1997년에는 김동만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돼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는 "자칫하면 간첩사건으로 조작될 수 있었다"며 "경찰이 일본에서 돈이 넘어오는 그림도 그렸는데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가 확정됐다"고 말했다. 그가 영상제작 장비를 구입한 돈은 그의 신혼집 전세금을 빼돌린 것이었고 전세금은 지인들의 보증 등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유언>은 4.3 때 토벌대가 제주시 아라동 박성내에서 100여 주민을 학살한 사건을 생존자들 증언으로 조명한다. 이 다큐는 당시 가해자인 경찰과 군인들의 증언도 함께 담고 있어 더 진실에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4.3을 빼닮은 아일랜드 내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열연한 데이미언(왼쪽, 킬리언 머피)과 형 테디(패드래익 들러니).
ⓒ 4.3평화재단
 
이튿날(7월 1일) 상영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아일랜드 역사는 제국주의 영국의 침략과 독립 후 내전, 두 측면에서 나라 이름만 다를 뿐 우리 현대사를 빼닮았다.

실제로 영국과 친밀했던 일본은 영국의 식민정책을 철저히 연구해 한반도에 적용했고 한민족 분리정책을 구사했다. 준군사조직인 '블랙앤탠스(Black and Tans)'가 국가폭력의 전위대로 나서서 가장 가혹하게 진압작전을 벌이는 장면은 4.3 당시 서북청년단과 양극단으로 갈라진 오늘의 시국을 떠올리게 한다.

젊은 의사 '데이미언 오도노반(Damien O'Donovan)'은 영국에서 개업하려고 런던으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필드하키와 비슷한 아일랜드 전통 경기 헐링을 하는데, '블랙앤탠스'가 공중집회 금지법을 어겼다며 이들을 급습한다. 데이미언의 친구 오설리반(O'Sullivan)은 이름을 말하라는 영국군의 지시에 아일랜드어로 대답했다가 시비가 붙어 목숨을 잃는다. 참고로 아일랜드에 많은 O'Donovan, O'Sullivan 식의 성은 '도노반의 자식' '설리반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결국 데이미언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투신하지만 동네 후배 크리스의 밀고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다. 총살 직전 탈옥한 이들은 크리스의 배신을 알게 되자 그를 처형한다. 데이미언은 그를 쏴 죽인 슬픔에 휩싸여 "이렇게 우리를 바쳐 싸우는 아일랜드가 그럴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영국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조약 찬성파인 형 테디와 반대파인 데이미언은 골육상쟁의 내전에서 적으로 맞서게 된다. 반대파는 자치가 아닌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고 남북 아일랜드의 분리에 반대하는가 하면 기득권 타파 등 사회의 모순을 함께 해결하려 했다.

분단에 반대하고 외세에 저항한 역사

4.3봉기의 주동자들이 남북분단의 분기점이 될 남한만의 5.10 선거에 반대하고 미군정의 실정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둘 다 섬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미군정 당국은 진압과정에서 제주도를 '빨갱이 섬' 곧 '레드 아일랜드(Red Island)'로 불렀다.

동포에게 혐오하는 말을 쏟아 붓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장면들은 한국전쟁과 제주4.3에서 재연된다. 자치정부의 장교가 된 형 테디는 사로잡힌 데이미언에게 "동료들의 은신처를 말해주면 살 수 있다"며 전향을 설득하지만 거절당한다. "내가 (밀고자) 크리스의 심장을 쐈어. 왜 그랬는지 형도 알잖아!"
 
▲ 데이미언을 처형해야 하는 형 데이미언이 끝내 밀고와 전향을 거부하자 동생의 심장에 총살 표적지를 달고 있는 테디.
ⓒ 4.3평화재단
 
리얼리즘 영화의 대가로 평가받는 켄 로치(Ken Loach) 감독은 영국인이면서 영국인의 만행과 내전의 참상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그렸다. BBC조차도 종종 왜곡보도한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의 진실을 영상으로 전한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다닐 때 BBC의 태도에 놀란 적이 있다. 박사과정 동료인 BBC 현직 중견언론인이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BBC의 왜곡보도 관련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BBC 지원으로 박사과정에 다녔을 텐데 자신들의 흑역사를 논문으로 쓰게 하다니! 한국 언론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편한 영화'를 꼭 봐야 하는 이유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에서 관객수가 1만4000여 명에 불과했다. 영화는 발명 당시부터 주로 오락물로 만들어졌고 관객들은 그걸 즐겼는데, '켄 로치 감독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는 선입견이 작용한 걸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향수가 아니다. 역사는 왜 우리가 지금의 모습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왜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가 향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들에게 적합한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역사는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며 따라서 역사를 탐구하여 민중에게 그들의 역사를 되돌려주는 것은 감독으로서 갖는 책임 중 하나이다.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4.3영화제를 주관한 제주4.3평화재단 고희범 이사장은 "75년의 시간, '4.3영화'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기록한 저항의 매체였고, 평화와 인권을 실현할 지혜를 모으는 민주적인 공론장이었다"며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성취와 내일의 희망이 살아 숨쉬는 영상 언어의 성찬을 행복하게 즐기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 4.3영화제 관객  6월 31일 4.3영화제 참석자 상당수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 시간 가량 ‘김동만 감독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 이봉수
 
* 4.3영화제는 7월 28일과 29일에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그린 <액트 오브 킬링>(2014, 조슈아 오펜하이머), 4.3단편영화 <땅은 늙을 줄 모른다>(2022, 김지혜)와 <메이·제주·데이>(2022, 강희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히는 <김군>(2019, 강상우)이 상영된다.
** 총 19편의 작품이 초대되는데, 주상영관은 제주CGV이며, 8월에는 롯데시네마 서귀포점, 9월에는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도 상영된다. 관람료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후원으로 모두 무료다.
 
▲ 4.3영화제 일정표 2023 4.3영화제 상영일정표
ⓒ 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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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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