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독립운동가 문일민의 손녀입니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 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김경준 기자]
* 에필로그 ① <"중앙청서 돌연..." 독립운동가 문일민과의 뜨거웠던 첫 만남>(https://omn.kr/24kzp)에서 이어집니다.
문일민 선생에게는 정진, 찬진, 국진, 탁진 네 명의 아들과 애진(정원) 이렇게 딸 한 명이 있었다. 2006년 부인 안혜순 선생의 별세 당시 부고 기사를 통해 자녀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시간이 또 많이 흘렀기에 자녀들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손자녀들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후손들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문일민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 내지는 변변한 기념사업회 하나 없는 상황에서 후손들이 어디에서 뭘 하고 사는지 알 길이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기적 같은 만남
그러던 어느날 나무위키에 등록된 '문일민' 문서를 살펴보던 중 누군가 문서를 수정한 흔적을 발견했다(나무위키는 누구나 자유롭게 수정에 참여할 수 있고, 그 흔적이 남기 때문에 누가 수정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수정자의 아이디 일부가 'moon'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직감적으로 문일민 선생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해당 아이디를 추적해보니 대전의 한 국립대학에 근무하고 있는 문 아무개 교수의 아이디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문 교수에게 "문일민 선생의 후손을 찾고 있는데 혹시 관계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이메일을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제102주년 삼일절 전날이었다.
이틀 뒤 답신이 왔다.
"김경준님, 저희 할아버지 항일광복 활동에 관심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4남 1녀(정진, 찬진, 국진, 탁진, 애진)을 두셨더랬습니다. 3남이신 제 아버지(문국진)는 한양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시고 제가 1남 2녀 중 가운데입니다."
그가 바로 문일민 선생의 손녀, 문수복 교수였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더니 하늘이 이렇게 돕는구나 싶어 뛸 듯이 기뻤다.
곧바로 그와 전화 통화를 했다. "할아버님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 할아버지가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대단한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왜 후손들이 그동안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냈는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문일민의 아들을 만나다
손녀 문수복 교수를 통해 문일민 선생의 자녀들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의 주선으로 문일민 선생의 3남 문국진 한양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 인터뷰 중인 문국진 교수(좌)와 정평완 선생(우)의 모습 (2021년 8월 16일 도곡동 자택) |
ⓒ 김경준 |
안타깝게도 문국진 교수는 고령으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흐릿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문일민 선생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늘 단신으로 도망다녔기 때문에 부자 간의 추억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버지가 황급히 집을 빠져나가고 얼마 안 있어 일제 경찰들이 들이닥쳐 "너희 아버지 어디갔냐"고 추궁하던 일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증언 자체가 늘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증언이었다.
또한 문일민 선생의 성격 등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들 문국진이 기억하는 아버지 문일민은 "여간해서는 화를 낼 줄도 모르고 남에게 폐 끼치는 일도 싫어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며느리 정평완 선생 역시 문일민 선생을 자상하고 상냥한 시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늘 항쟁을 했지만 가정에서는 말수도 별로 없으시고 착하셨어요. 늘 내가 직장 나갈 때면 '에미야, 밥 많이 먹어라', '춥다. 덥게(따뜻하게) 입고 가라' 그런 말씀밖에 없으셨어요."
후손들로부터 전해 들은 아버지 문일민의 모습은 상당히 의외였다. 그동안 사료를 통해 접한 독립투사 문일민은 그 누구보다 불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총과 폭탄으로 일제와 맞서 싸우고, 해방 후에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개탄하여 스스로 할복까지 시도했던, 뜨겁디 뜨거운 성정의 사나이 아니었던가.
함께 살며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을 가족들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귀한 사실들을 나는 후손들과의 만남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인터뷰 중 후손들은 두꺼운 스크랩북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동안 문일민 선생에 대해 가족들이 자체적으로 기록·수집한 자료들이었다. 문일민 선생의 이력서를 비롯하여 사진, 신문 기사, 중국 활동 당시 사용했던 여권 사진, 부인 안혜순의 회고록 등 지금까지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이었다.
뜻밖의 수확에 처음에는 뛸 듯이 기뻤으나, 이내 두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후손들로부터 이렇듯 귀한 자료까지 받았는데 혹여 나의 부족한 역량 탓에 문일민 선생의 삶을 온전히 조명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초보 연구자로서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런 두려움이 있었기에 논문을 쓰는 동안 나태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1962년 10월 20일 문국진·정평완 결혼식에 참석한 문일민 선생(가운데 지팡이를 짚은 사람) |
ⓒ 문국진 |
이후로도 논문을 쓰는 동안 후손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2022년 3월 13일 분당의 한 식당에서 문일민 선생의 4남 문탁진 고려대 재료공학과 명예교수를 인터뷰했다.
인터뷰 당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문탁진 교수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문일민 선생이 마치 살아돌아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버지와 판박이였던 것이다.
▲ 인터뷰 중인 문탁진 교수(좌)와 기자(우) (2022년 3월 13일 분당 닐리에서) |
ⓒ 김경준 |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품 속에서 서류 더미들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펜으로 일일이 밑줄을 쳐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문일민의 이력부터 시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주소 및 약도 등을 일일이 수기로 정리해온 것이었다. 그 꼼꼼함과 뛰어난 기억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때의 나는 문일민 선생에 관한 사소한 기록 한 줄, 사진 한 장이 절실하던 차였다. '문일민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문일민은 이때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궁금하던 것들이 후손들과의 만남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 문탁진 교수가 손으로 일일이 작성해 온 자료들 |
ⓒ 김경준 |
후손의 특별한 배려
"논문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저희에게 보여주지 마세요."
어느날 손녀 문현아 선생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어쨌든 후손이기에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습니다. 혹 할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있으면 간섭하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선생님도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로 논문을 쓰는 게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배려에 적잖이 놀랐다. 사실 문일민 선생의 민족운동을 재조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했지만, 역사학 논문이란 누군가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쓰는 게 아니다. 비판할 점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비판해야만 한다. 사관에게는 그런 냉철한 태도가 요구된다.
그러나 후손들 입장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터. 실제로 일부 독립운동가 후손들 중에는 자신의 조상을 욕보였다며 학술적 근거에 기인한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고 강하게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먼저 이런 말을 꺼낼 줄이야.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로구나' 속으로 감탄했다.
그렇게 후손들의 협조와 배려 덕분에 2022년 6월 마침내 <무강 문일민의 생애와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논문 완성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후손들을 만나 논문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직접 전달하지 못한 후손들에게는 택배로 발송했다. 논문 발송 직후 한 후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가문의 영광을 어떻게 표현할지요! 정말로 깊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논문 심사를 통과하던 순간보다 더 뿌듯하고 기뻤다. 누군가에게 인정 받으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논문이 한 가문에게는 명예가 되고 자부심이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큰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고 문국진 교수 영전에 올린 논문
그런데 논문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국진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고인 역시 공군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였기에 국립서울현충원 제2충혼당에 안장됐다. 아버지 문일민, 어머니 안혜순과 같은 공간에 잠들게 된 것이다.
고인이 별세한 직후 나는 충혼당을 찾아 논문을 헌정하고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나중에 듣기로 고인은 돌아가시기 전 내가 쓴 논문을 받아보았다고 한다. 생전에 완성된 논문을 보여드릴 수 있었기에 그나마 마음의 짐을 덜었다고 해야할는지.
▲ 2022년 8월 27일 故 문국진 교수 영전에 논문을 올리다 |
ⓒ 김경준 |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 번 문국진 교수의 명복을 빌며 하늘에서 부모님과 이승에서 못 다 나눈 혈육지정을 나누시기를 기원한다. 또 논문이 나오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문일민 선생의 후손들께도 감사드린다.
* 에필로그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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