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랄리 수제자' 트린지 감독, 페퍼저축 '자책골' 끝낼까
[박진철 기자]
▲ ?2016년 리우 올림픽 미국 여자배구 대표팀 동메달..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카치 키랄리 감독, 뒷줄 맨 오른쪽이 조 트린지 기술 코디네이터 겸 전력분석관(현 페퍼저축은행 감독) |
ⓒ 국제배구연맹 |
페퍼저축은행이 조 트린지를 만난 건, 사실 천운에 가깝다. 국내 프로배구에서 감독이 중도 사퇴할 경우 후임 감독을 영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두 달 이상도 걸린다.
그런데 페퍼저축은행은 전임 감독이 돌연 사퇴한 후 불과 5일 만에 훨씬 명망 있고 국제대회 코칭 경험까지 많은 후임 감독을 영입했다.
페퍼저축은행은 지난 6월 30일 아헨 킴(38·미국) 감독의 후임으로 조 트린지(36·미국) 감독을 선임했다. 조 트린지 신임 감독은 1987년생으로 상당히 젊다. 대한항공 토미 감독, 흥국생명 김수지 선수와 동갑이다. 김연경(흥국생명), 오지영(페퍼저축은행) 선수보다는 1살 많다.
그러나 지도자와 대표팀 경력은 아헨 킴 감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때문에 아헨 킴 감독의 사퇴로 크게 실망했던 배구 팬들도 팬 사이트 등에서 조 트린지 감독 영입에 대해선 대환영하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실제로 아헨 킴 감독은 대부분 미국 대학팀 감독을 역임했고, 대표팀 코칭 경력은 전무했다. 그런데 조 트린지 감독은 딱 한 줄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 그는 현재 여자배구 세계 최강인 미국 여자배구 대표팀 카치 키랄리(63) 감독의 '수제자'다.
▲ ?조 트린지(36) 페퍼저축은행 신임 감독 |
ⓒ 페퍼저축은행 |
키랄리 감독은 지난 2013부터 현재까지 11년째 미국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그리고 미국 여자배구를 세계 최강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도쿄 올림픽에서는 미국 여자배구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밖에 세계선수권,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 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7일 현재 미국 여자배구는 세계랭킹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런 키랄리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처음 맡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 동안 조 트린지를 미국 여자배구 대표팀의 기술 코디네이터 겸 전력분석관으로 영입해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서 2014년 세계선수권 우승, 2015년 월드그랑프리 우승, 2016년 리우 올림픽 동메달 등을 함께 일궈냈다.
또한 키랄리 감독은 자신을 대신해 조 트린지를 미국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해서 국제대회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그에 따라 조 트린지는 2021년 북중미카리브해(NORCECA)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 자격으로 대표팀 2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그만큼 조 트린지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키랄리 감독은 조 트린지가 페퍼저축은행 감독으로 공식 발표되던 날, 구단을 통해 찬사를 보냈다. 그는 "조 트린지는 혁신적인 사고와 분석력, 경기에 대한 열정으로 미국 대표팀이 개선되고 뛰어난 결과를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코칭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V리그에서 AI페퍼스 감독으로 성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조 트린지 감독은 2019년에는 캐나다 여자배구 대표팀 코치, 2022년에는 캐나다 남자배구 대표팀 수석코치를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조 트린지는 전술·전략, 훈련 시스템, 데이터 기반 경기력 분석 분야에서도 권위자이다. 스포츠 과학 및 통계 분석 관련 Smart Volley 저자로도 유명하다.
구단의 대형 자책골, 이제는 그만
페퍼저축은행이 조 트린지 감독을 초고속으로 영입하면서 아헨 킴 감독 사퇴와 관련한 일부 의혹과 낭설은 무의미하게 됐다. 이미 오래 전부터 페퍼저축은행 구단과 아헨 킴 감독이 서로 사임 문제를 합의하고, 후임 감독 영입 작업을 진행해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전개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헨 김 감독은 아내의 미국 프로팀 감독 발탁으로 가족이 생이별을 하는 상황을 피하게 됐고, 페퍼저축은행도 불안 요소가 있는 감독을 시즌 때까지 끌고가는 것보다 더 명망 있는 감독 후보가 나타났을 때 재빨리 영입하면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러나 페퍼저축은행의 구단 운영상 문제점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자칫 이번 사태로 감독 공백 기간이 길어졌다면, 올 시즌을 망치는 결정판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겪게 될 혼란과 사기 저하는 두말할 것도 없다. 특히 지금은 V리그 모든 팀들이 한창 시즌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시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페저저축은행은 지난 2021년 4월 팀 창단 이후부터 최근까지 구단 스스로 판단 착오와 운영 미숙으로 배구계와 팬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 대형 사태가 몇 차례 발생했다. 대부분의 사태가 팀 전력과 구단 모기업 이미지를 스스로 갉아먹는 '자책골'이었다.
페퍼저축은행은 지난 2021년 4월 초대 사령탑으로 70대 국내 감독을 선임했지만, 결과적으로 초기 선수 구성과 전력 안정화에 실패했다. 그 여파로 지난 2시즌 동안 V리그 여자부 역대 최다 연패 공동 1위(20연패)를 기록하는 등 크게 부진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학교폭력 논란으로 국내 배구계에서 퇴출된 이재영(27)과 접촉했다가 여론의 비난 뭇매를 맞고 슬그머니 철수했다. 그러면서 신생팀으로 동정표를 받던 호감 이미지마저 퇴색됐다.
우승 후보급 전력 보강에 너무 취했나
고난의 2시즌을 보낸 후, 그토록 고대했던 전력 강화 훈풍이 불어왔다. 지난 4월 FA 시장에서 V리그 대표급 공격수인 박정아 영입에 성공했다. 기존의 대표팀 출신 이한비와 함께 탄탄한 아웃사이드 히터진을 구축했다. 또한 5월 트라이아웃에서 지난 시즌 V리그 최고 외국인 선수로 활약했던 아포짓 포지션의 야스민(27·192cm·미국)을 선발했다. 여기에 도쿄 올림픽 주전 리베로 오지영, 수준급 세터 이고은, 미들블로커도 최가은, 서채원, 부상에서 복귀할 하혜진과 염어르헝, 아시아쿼터로 선발한 필립스(28·182cm·필리핀)까지 한층 풍요로워졌다.
야스민의 허리 부상이 재발하지만 않는다면, 페퍼저축은행의 올 시즌 멤버 구성은 우승 후보급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페퍼저축은행은 크게 강화된 반면, 다른 팀들은 주전 선수의 FA 이적, 부상·재활 등으로 전력 누수가 발생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력 보강의 기쁨이 주체할 수 없이 넘쳐서 판단력이 흐려졌을까. 가장 쉬운 FA 보호 선수를 묶는 과정에서 페퍼저축은행은 팀에서 대체 불가능한 주전 세터 이고은(28)을 제외시키는 '판단 착오'를 하고 말았다. 구단이 선호했던 신인급 유망주를 모두 지키겠다는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그 바람에 페퍼저축은행은 이고은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한국도로공사에게 주전 미들블로커 최가은과 올 시즌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까지 사실상 공짜로 헌납했다.
페퍼저축은행이 순리대로 확실한 주전 선수 5명을 우선 보호 선수로 묶었다면, 그런 사태는 애당초 일어날 수도 없었다. 오히려 한국도로공사 사정을 감안하면, 주전 선수 5명과 선호했던 신인급 유망주까지 모두 지킬 수도 있었다. 설사 유망주를 내준다고 해도 1명으로 끝날 일이었다. 페퍼저축은행의 전력 유지에는 거의 타격이 없다.
이고은 후폭풍이 가라앉을 만하자, 이번에는 올해 2월에 영입한 아헨 킴 감독이 4개월 만인 6월 25일, 돌연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행히 후임 감독 조기 영입으로 일단락됐지만 팬들의 짜증 지수는 높아져갔다.
▲ ?2021년 북중미카리브해(NORCECA)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을 맡은 조 트린지 감독(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
ⓒ ?북중미카리브배구연맹 |
사실 페퍼저축은행은 신생팀임에도 프로 구단으로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도 많다. 장매튜(56) 구단주 주도로 팀 전력 보강, 선수 복지 등에 기존 구단들 못지않게 전폭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실제로 페퍼저축은행은 올 시즌 선수 전체 연봉(샐러리캡)이 여자부 7개 구단 중 2위를 기록했다. 1위 흥국생명과 거의 비슷하다. 샐러리캡 25억 원을 꽉 채울 정도로 선수 보강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광주광역시 연고지 정착을 위해 유소년 팀 창단과 단계별 학교 배구팀 지원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투자는 않고 '하위권 팀 특혜'에 의존하는 구단, 여러 여건상 좋은 유망주 육성이 불가능해진 학교 배구가 배출한 선수를 받아먹기만 하는 현행 신인 드래프트 제도를 계속 고수하면서 기량 떨어진다고 불평만 하는 구단들에 비하면, 페퍼저축은행의 적폭적 투자는 훨씬 프로답고 V리그 발전에도 긍정적이다.
꼴찌→상위권 도약... '마지막 기회' 살릴려면
문제는 어렵게 쌓은 호감 이미지를 뜬금포 자책골로 까먹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페퍼저축은행 구단이 할 일은 분명하다. 프로배구단을 창단한 이유와 초심을 잘 지키고 살려가는 것이다. 상식에 부합하고 도덕성에 기반한 구단 운영을 해야 팬과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모기업의 광고·홍보 효과도 극대화될 수 있다. 프로 스포츠에서 성적도 중요하지만, 팬이 떠난 프로는 존재 이유도 존립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는 조 트린지 감독이 자신의 역량을 페퍼저축은행에 잘 녹여낼 수 있도록, 그가 원하는 요구 사항을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다. 조 트린지 감독은 오는 9일 한국에 입국해, 본격적으로 페퍼저축은행을 지휘한다. 29일 개막하는 KOVO컵 대회에서 국내 데뷔전을 치를 수도 있다.
그는 최근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배구 황제' 김연경을 향해 "한국 배구뿐만 아니라 세계 배구의 전설"이라고 극찬을 했다. 그러면서 "페퍼저축은행에도 많은 훌륭한 선수들이 있다. 그들이 최고의 배구를 준비하도록 돕겠다. 최선의 팀을 만들고 올바른 경기를 하는데 집중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페퍼저축은행이 꼴찌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기존 팀들과 치열한 순위 경쟁을 펼치길 바라는 배구계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지는 올 시즌 V리그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레이크뉴스에도 송고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정치생명 건다는 원희룡, '빼박' 증거 나왔다
- 원희룡 폭주에 여당 내부도 반발...국회까지 달려온 양평군수
- 폭염에 고장난 교실 에어컨... 신선했던 아이들의 반응
- "친북은 독립유공자 불인정" 보훈부 논리면... 교과서도 문제
- 예약 안 하면 자리 없던 초밥집이 텅텅 비었다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묻고 더블로?' 장관님들 이제 그만 걸어주세요
- [단독] 대통령이 참관한 그 수업들, 그날만 '교실 바꿔치기'
- 정부는 방치했는데... 광주의 '100억 투자'가 놀라운 이유
- 김치말이 국수 만들 때 이왕이면 이게 더 좋습니다
- 정의당, IAEA 사무총장 향해 '끝장토론' 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