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맹주의의 시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박준영 기자]
1955년 4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으로 모여든다.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Asian–African Conference, 이하 AA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AA회의는 반둥회의, 비동맹회의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 회의를 개최한 인도네시아에서 AA회의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므로, 이 기사에서는 AA회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도네시아는 1949년 독립 이후 냉전을 극복하는 해방적인 세계 질서를 위한 '제3세계' 국가의 연대를 강조했고, 대상 국가들이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AA회의가 성사된다.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이집트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 29개국이 참석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때 아시아 패권 국가의 꿈을 갖고 제국주의 팽창을 시도했던 일본도 AA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AA회의는 참석국 간 평등한 관계를 지향했지만 인도네시아, 중국, 인도, 이집트 등 주요 국가의 발언권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중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한국은 참석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재건 과정에서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미국 의존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비동맹 국가들은 이러한 한국의 외교 전략이 AA회의 취지에 반한다고 판단해 초청 대상에서 제외했다.
1. 기본적인 인권과 유엔 헌장의 목적과 원칙을 존중
2.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
3. 모든 인류의 평등과 크고 작은 모든 나라의 평등을 승인
4. 타국의 내정에 불간섭
5. 유엔 헌장에 의한 단독 또는 집단적인 국토방위권을 존중
6. 집단적 방위를 강국 특정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7. 침략이나 침략의 위협이나 무력행사는 타국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침범하지 않는다.
8. 국제 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
9. 상호 이익과 협력을 촉진
10. 정의와 국제 의무를 존중
약 70년 전에 세워진 이 원칙이 현재의 국제 정세에 주는 함의는 크다. AA회의는 성황리에 막을 내리고 정례 회의를 계획했지만,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 2차 회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둥 10원칙에 기반한 작은 단위의 국가 간 협력은 지속된다.
지난 4일 기자는 인도네시아 반둥의 AA회의 박물관에 방문했다. 박물관의 건물 이름은 독립관(Gedung Merdeka)인데, 이는 AA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다. 이 건물은 1895년 네덜란드 식민 시대에 건축되었으며, 1926년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으로 개조했다. 당시 건물의 이름은 'Sociëteit Concordia'이었으며,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고위 관료 및 사업가들의 사교 장소이자 공연장이었다.
▲ AA회의 박물관이 위치한 게둥 메르데카(Gedung Merdeka) |
ⓒ 박준영 |
박물관은 크게 두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입장권을 사고 박물관에 들어가면 방문자들은 먼저 AA회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전시한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AA회의 사진과 관련 문서의 원본과 사본, 당시 참석자들의 밀랍 인형과 당시 언론 보도 자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AA회의의 배경이 되었던 국제 정세와 AA회의의 준비 과정, AA회의의 주요 성과 그리고 비동맹주의의 현재적 의미까지 꼼꼼하고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AA회의에서 수카르노 대통령의 기조연설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 AA회의를 재현한 전시장 |
ⓒ 박준영 |
▲ 비동맹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AA회의에 참석하며 남긴 서명 |
ⓒ 박준영 |
▲ AA회의 박물관에 전시된 AA회의 당시 사진 |
ⓒ 박준영 |
이 전시관을 지나 비동맹주의 국가의 국기를 따라 긴 복도를 지나면 AA회의 회담장으로 연결된다. 복도의 수많은 국기 사이에서 한국의 국기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도 AA회의 50주년, 60주년 기념 행사에 정부의 대표자가 참석하여 다른 비동맹주의 국가들의 국기와 함께할 수 있었다.
▲ AA회의 박물관의 회담장 |
ⓒ 박준영 |
수카르노와 네루, 저우언라이 등 비동맹국가 지도자들의 대안적 국제 질서를 위한 절박하면서도 희망찬 외침을 상상하며 회담장에 한동안 서있었다. 비동맹국가 지도자들이 당시 가졌던 설렘과 긴장감 그리고 책임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박물관을 나오면 건너편에 호텔 사보이 호만(Hotel Savoy Homann)을 볼 수 있다. 언뜻 보기에도 역사성이 느껴지는 건물인데, 이 호텔은 당시 AA회의 참석자들이 묵었던 호텔이다. 현재도 이 호텔은 그 역사적 의미를 보존하며 호텔로 운영되고 있다.
비동맹주의는 냉전과 화해의 시기를 지나며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세계는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신냉전'으로도 불리는 국제 외교 전략에서 두 개의 선택지를 강요받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주요 비동맹주의 국가들은 오랜 시간 비동맹주의의 기치를 유지하고 자주 상기하고 있다. 다시 한번 대안적 전략을 절박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 비동맹주의가 주목받고 있다. 미완으로 끝났던 비동맹주의의 시대는 비로소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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