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무척 기이했던 ‘쿠데타의 풍경’

태원준 2023. 7. 7.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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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마주한 푸틴의 위기에 러시아 대중은 무관심과 냉소
엘리트 집단은 침묵·눈치보기 아무도 그를 지키려 나서지 않아

실패한 쿠데타라 부르고 있지만 정작 실패한 건 푸틴의 통치체계
‘82% 지지율’은 허상이었고 ‘스트롱맨’ 알고보니 허약했다

포스트 푸틴의 세계 슬슬 준비할 때가 된 듯하다

거리를 쓸던 청소부의 비질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바로 뒤에 장갑차 여러 대가 러시아군 전쟁사령부 건물을 향해 포신을 치켜들고 있었지만, 빗자루를 쥔 양손의 각도는 일정했고 좌우로 느릿하게 흔드는 리듬도 규칙적이었다. 2주 전 바그너 용병이 점령한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에선 ‘쿠데타의 풍경’을 포착한 영상이 숱하게 촬영됐다. 그중에 담긴 저 청소부의 무심한 모습, “내 알 바 아니다” 말하는 듯한 비질은 쿠데타니, 내전이니 하는 상황의 긴박함을 무색케 했다.

용병 수장이 갑자기 “정의의 행군”을 외치며 모스크바로 진격한 것은 무척 놀라웠는데, 그 24시간 동안 러시아 곳곳에서 목격된 풍경은 차라리 기이했다. 로스토프에 진주한 용병들은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들고 다녔다. 탄창 끼운 소총을 둘러멘 채 커피숍에 줄을 섰고, “뚜껑 좀 닫아주세요. 탱크에 엎질러질까봐” 하면서 커피를 받아갔다. 그들 사이사이엔 가방을 둘러멘 시민들이 ‘늘 쿠데타 군인과 함께 커피 줄에 섰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이날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축제일이었다. 고교 졸업생을 위한 이 전통 축제는 네바강에 많은 요트를 띄운 채 예정대로 성대히 진행됐다. 한 참가자는 쿠데타 상황에 대한 의견을 묻는 러시아 기자에게 “모스크바 쪽에서 무슨 전쟁 같은 게 났다던데…” 하고는 서둘러 술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당시 푸틴의 행방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쿠데타의 심각성을 모른 채 워낙 좋아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축제에 갔었다는 설도 있고, 저택이 있는 발다이로 몸을 피했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그가 모스크바를 비웠다고 알려지자 러시아 네티즌은 금세 푸틴 사진에다 “내게 필요한 건 탄약이 아니라 차편”이란 글귀를 적어 SNS에 올리며 낄낄거렸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했던 말을 뒤집어 그를 조롱한 것이다.

쿠데타가 터지자 러시아 SNS는 긴장과 걱정 대신 이런 풍자와 농담의 바다가 됐다. 용병부대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동안 전쟁영화의 한 장면에 넷플릭스 로고와 ‘바그너, 개봉박두’란 문구를 곁들인 영상이 등장했고,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프리고진과 협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혹시 엉뚱한 프리고진이랑 협상한 거 아니냐?” 하는 우스개가 이어졌다(바그너 수장은 예브게니 프리고진인데, 이오시프 프리고진이란 유명 음악프로듀서가 있다).

러시아 사회는 크게 세 계층으로 나뉜다. 일반 대중, 엘리트 집단, 그리고 푸틴. 쿠데타를 대하는 대중의 시선은 이렇게 시니컬했다. 푸틴의 권력에 기생하는 엘리트 집단은 조금 달랐는데, 그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쿠데타 발발 10시간 만에 푸틴이 TV 연설에 나설 때까지, 그리고 다시 협상 타결이 발표될 때까지 내각의 어떤 장관도, 여당의 어떤 의원도, 군의 어떤 장성도 푸틴을 지지하는 공개 성명을 내놓지 않았다.

바그너가 모스크바를 향해 800㎞를 달려가는 동안 저지 명령을 받은 정규군은 주유소 하나, 다리 하나, 고속도로 한 지점을 파괴했을 뿐이다. 진격을 저지하는 흉내만 냈다. 막은 것도 아니고, 막지 않은 것도 아닌 대응은 군 엘리트조차 눈치를 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푸틴을 지켜야 할 이들이 누가 이기나 지켜보는 관전자처럼 굴었다. 푸틴의 프로파간다 선봉장인 마르가리타 시모냔 러시아투데이(RT) 편집장은 이 눈치 보기의 끝판왕이라 부를 만했다. 쿠데타가 진행되는 동안 텔레그램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던 그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나타나 말했다. “여러분, 미안. 제가 휴가 간 사이 일이 좀 있었네요.”

혁명의 성패는 체제를 뒤엎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체제를 지키려 나서는 사람의 수에 달려 있다고 한다.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가 실패한 건 에르도안을 지키려는 무슬림들이 뛰쳐나와 목숨을 잃어가며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푸틴은 대중의 냉소와 엘리트의 침묵 속에서 이웃나라 대통령의 손을 빌어 간신히 반란군을 돌려세웠다. 실패한 쿠데타라 불리지만, 정작 실패한 건 푸틴의 통치시스템이다. 82% 지지율은 허상이었음이, 스트롱맨은 알고 보니 허약했음이 드러났다. 1917년의 쿠데타는 러시아의 1차 대전 패배를 거쳐 8개월 만에 정권 전복을 불렀다. 2023년 다시 쿠데타가 벌어졌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이다. 이번엔 몇 개월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포스트 푸틴의 세계를 준비할 때가 된 듯하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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