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박한 아름다움,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Q : 실내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 전시 디렉팅 등 공간을 중심에 두고 전방위로 일하고 있습니다
A : 우리를 실내장식가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간과 행위를 함께 설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공간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람의 행위에 도움이 되는 장치를 만들 것인가에 폭 넓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 중 하나는 누구나 24시간을 산다는 거예요. 공간은 반드시 시간을 전제로 존재하기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Q : 수많은 액자로 가득한 성수동 LCDC의 이페메라는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상징적인 곳이 됐어요
A : 이페메라는 익명의 지류들을 뜻해요. 공간을 만들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은 액자 하나하나의 배치였어요. 김재원 대표가 수집했던 우표와 지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을 전달받았어요. 19세기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만들어진 멋진 수집품을 만나 너무 기뻤지만, 자칫하면 잡동사니처럼 보일 수 있거든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를 중심에 두고 작업했어요. 몇 천 장의 지류를 컬러로 프린트해 모형을 만들었어요. 어떤 것들은 못으로 박기도 하고 3mm 정도 허공에 띄우거나 살짝 틀어서 부착하기도 했죠. 미묘한 입체감과 액자 프레임을 조정해 하나하나 귀하게 보이길 바랐어요. 제가 느꼈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랐거든요. 누구든 제 이야기를 듣고 다시 LCDC에 가게 된다면 액자들을 유심히 봐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Q : 가구 디자인에도 진지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A : 가구는 공간 언어 중에서 가장 신체적인 언어인 것 같아요. 옷으로 비유하면 공간 요소 중에 속옷과 가까운, 인간의 신체가 닿는 부분인 거죠. 재미있는 점은 가구설계를 공간 디자이너들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가구 디자이너, 건축가들도 디자인하는데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가구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워요. 온양민속박물관을 위해 만든 의자는 등받이가 낮아 편하지 않아요. 가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설계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저희는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가 하는 관점에서 디자인했죠. 천장 공사도 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층고였기 때문에 의자가 높으면 바깥 풍경이 고요하게 보이지 않고 너무 시끄러운 거예요. 온양민속박물관은 정원이 무척 아름답거든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햇빛과 나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Q : 전시 디렉터로서 공예에 주목했습니다. 예올과 샤넬이 함께한 프로젝트 〈반짝거림의 깊이에 관하여〉로 던지고 싶었던 화두는
A : 왕궁 마당에서 공주가 산책하는 장면을 상상해 봤어요.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옷 위에 박힌 금박 위로 햇빛과 달빛이 닿으면 걸을 때마다 반짝였을 거예요. 그 반짝임의 묘미가 전기를 사용하는 현대에 와서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싶어요. 아마도 금박은 형광등 불빛 아래보다 달빛 아래서 더 아름답게 빛났을 거예요. 반짝임이 갖는 진가와 미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고 싶었어요. 당시의 옷 문양에는 늘 건강하기를, 복을 많이 받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어요. 한국의 기복 문화가 참 아름답잖아요. 복주머니를 여러 크기로 만들고, 금박으로 현대인이 바라는 꿈, 별 등을 한글로 적기로 했죠. 뛰어난 장인들과 협업할 수 있었던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Q : 한국문화를 재해석해 공간에 녹이는 작업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나요
A : 제가 만든 모든 작품에는 한국의 정체성이 숨어 있어요. 그 색이 짙냐 연하냐 하는 차이만 있죠. 그중 두수고방은 현 시대의 한국적인 공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은 해답이라고 생각해요. 기준이 됐던 건 정관스님이고요. 보통 절에 가려면 숲속의 긴 길을 걸어 오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마음이 한결 정리되고 근심을 내려놓게 돼죠. 동선부터 마당과 문, 축으로 닫히고 연결되는 여러 가지 공간감을 형성하는 부분이 한국 건축의 전통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어요. 두수고방이 자리한 곳은 광교 앨리웨이, 즉 아파트가 둘러싸인 쇼핑몰인데요. 그래서 적어도 두수고방 안에서는 고요한 길을 걷는 것처럼 동선을 확보했어요. 부엌 앞에 커다란 돌을 내려둔 것도 움직임을 세분화한 거예요. 그냥 쓱 들어서는 게 아니라 높은 디딤돌이 있으니까 발을 올리고 돌을 디디면서 걸음이 길게 느껴지길 바란 거죠.
Q : 앞으로 만들고 싶은 공간은
A : 담백하고, 검박하고, 너무 멋지지 않은데 그냥 가면 마음이 너무 좋은 공간. 그 좋은 느낌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저는 불완전한 걸 좋아해요. 완벽하지 않고 약간 불균형한 공간을 인간과 시간이 채워가면서 만들어 가는 모습을 사랑해요. 세련되고 트렌디한 건 쉬워요. 대놓고 멋진 공간은 어쩐지 생활하기에 불편할 때가 있어요. 저희 작업의 공통점 중 하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쓰임이 다양하고 사람이 만들어 채워갈 수 있는 부분이 있죠.
Q : 오랜 시간 공간디자이너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생생하게 체감하고 있는 변화는
A : 사무실을 옮긴 지 5년 정도 돼가고 있어요. 커다란 창 앞에 나무들이 가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매일 자연을 관찰하게 되더라고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고 깨달은 게 많아요.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의 작업은 늘 포근하지.” 이런 평가도 너무 기쁘지만 저는 우리 작업이 변신술을 부리는 것처럼 각기 다르게 비춰지길 바라요. 작은 변화를 모색하고, 실험하고, 또 실패하기도 하면서요. 그러려면 꾸준히 노력해야겠구나 싶어요. 사람의 감정을 순식간에 동요시키는 멋진 프로젝트는 많잖아요. 저는 진짜 마음이 움직이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따뜻해지거나, 울컥할 수도 있는. 내년에도 좋고 그 후년에는 더 좋은 ‘타임리스’한 공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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