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차관정치’란 착시
한국 정치의 교과서 같은 존재인 김종인 전 의원이 얼마 전 “내가 보기엔 이런 국정 운영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 같다”고 했다. 개각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차관급 13명을 교체하면서 대통령실 비서관 출신 5명을 발탁한 걸 두고서다. 그는 “장관은 그대로 놔두고 차관을 시켜서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갖다가 반영하라 그러면, 장관은 대통령 국정 철학과 별 관계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맞는 얘기다. 정확하진 않다. 실세 차관을 국정 동력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차관 정치’다.
“힘 있는 차관이 장관을 보좌해 관료들을 다잡고 대통령 개혁 프로그램을 현장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장관=외부 전문가(또는 명망가), 차관=실무 관료’란 기존 틀로는 개혁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란 인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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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각이라며 차관 대거 교체
장관 보완한다지만 제한적
정쟁형 인사청문 반복 여파
」
이명박(MB) 정부 때인 2009년 1·19 개각에 대한 분석 기사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탁 외 하이라이트는 차관급 15명 교체였다. 그 유명한 박영준 국무차장, 지금은 교육부총리인 이주호 교육차관 기용이 그때 이뤄졌다.
당시 맥락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MB 정권이 대선·총선에서 압승하며 완벽한 보수 우위라고 느끼던 찰나, 광우병 시위를 만났다. 반대 진영이 투표장에 안 나왔을 뿐 여전히 막강한 동원·결집력을 지녔다는 걸 절감했다.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이 과반 의석이었으나 MB계만으론 국회 운영이 불가했다. 사실상 여소야대였다. 전면적인 인사청문회가 이뤄진 첫 정권이었다. 이전엔 개각이 대통령에게 좋은 국면 전환 카드였지만 이때부턴 리스크가 됐다. 실력 있고 염치 있는 사람들은 장관직에 손사래 치고, 무탈하게만 살아왔거나 얼굴 두꺼운 사람이나 탐내게 됐다. 한 자리를 두고 수십 명을 검증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대한민국이 전무후무한 인재 강국도 아니고, 장관감이 흘러넘칠 리 만무했다. 그저 그런 장수(長壽) 장관이 쏟아졌다. 힘 있는 차관론이 등장한 배경이다.
논란의 인물이었던 박영준 전 차관에게 당시 경험을 평가해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장관은 외부 행사가 너무 많아 차분히 앉아서 일을 팔로업할 시간이 별로 없다. 장관들끼리 모이기도 어렵다. 차관들은 실무 경험이 있고, 모이는 것도 가능하다. 내 경험상 관련 서너 부처 차관들이 사전에 모이면 실질적 토의도 가능하다. 이렇게 차관회의를 거친 어젠다가 국무회의로 넘어가면 숙성된 것이어서 현실적인 정책이 나온다.”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겠다. 지금은 어떤가. 대부분 조건이 당시보다 엄혹하다. 유례없는 여소야대다. 대선 연장전(지방선거)에 이은 재연장전(총선)을 앞두고 있다. ‘인사청문회 부적격 판정’이 상수(常數)가 됐다. 대통령실 주변에선 “OOO 장관 문제 있다”고 하는데 바뀌는 일은 없다. 야당에 공격 기회를 준다고 여기는 듯하다. 장관 리더십은 크게 흔들린 채다. 대신 차관들만 바뀐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차관이 대단히 실력 있으면 장관의 한계를 메울 수 있을까. MB 정부서 당·정(고용노동부 장관)·청(대통령 비서실장) 요직을 두루 경험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의 말은 이렇다. “지금은 사실 방향이 정해져 있다. 이걸 어떻게 실현할 거냐, 실제 정책으로 만들어내느냐는 차관이 전문가다. 방향성을 공감하는 차관은 더더욱 중요하다. 일부에선 차관을 통해 장관을 무력화한다는데, 행정부가 장관을 건너뛰고 일을 하는 구조가 아니다. 보완은 해도 제치고 할 수 있는 건 없다.” MB 정부와 현 정부를 다 아는 여권 인사의 표현은 더 명확했다. “장관과 차관의 역할이 다른데 어찌 차관이 장관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겠나. 아주 제한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최고의 사람들로 정부를 구성해도 제대로 일할까 말까다. 우린 그 길이 막힌 채다. 대통령 탓도 있지만, 근원적으론 청문회 문화 탓이 클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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