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한국의 현수막, 미국의 야드사인
지난봄, 워싱턴 발령 이후 처음으로 서울을 다녀왔다. 2년 반의 시간이었지만 벌써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여의도 국회 앞을 도배하고 있던 현수막이었다. 현수막에 어지럽게 둘러싸인 의사당 모습도 부조화였지만, 원색적인 문구들은 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참여와 지지를 바란다기보다는 상대편에 대한 배설이 목적인 듯 보였다.
‘표현의 자유’를 항상 내세우는 미국에서조차 정치 현수막을 본 기억이 없다. 도시 미관을 까다롭게 규제하는 워싱턴 연방의회 근처에선 더욱 그렇다. 미국에서 선거철 현수막 역할을 하는 게 ‘야드 사인(Yard Sign)’ 정도다. 30~100㎝ 정도 되는 작은 직사각형 팻말 양쪽에 철사를 달아 땅바닥에 꽂을 수 있게 했다. 투표소 근처, 도로변, 가정집 마당에 놓는데, 지역마다 다르지만 게시할 수 있는 장소·기간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당연히 교통이나 보행에 방해를 줘선 안 된다.
야드 사인에 들어가는 메시지는 단순할수록 좋다고 한다. 당적을 드러내고 여러 문구를 적기보단, 자신의 이름, 출마 목적 정도만 밝힌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는 연구결과(하이포인트대, 2015년)도 있다. 예컨대 ‘트럼프’라는 이름 밑에 ‘미국을 더 위대하게’ 한마디만 적으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야드 사인의 기원은 1820년대로 올라간다. 당시 대선 후보이던 존 퀸시 애덤스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마당에 지지 팻말을 꽂도록 한 게 시초다. 지금도 유권자들의 자발적 참여에 기대기 때문에 야드 사인의 홍보 효과를 더 크게 본다. 야드 사인 한 개가 후보자에게 6~10표를 가져다준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한국에서 현수막이 범람하게 된 것은, 정당 활동 보장을 이유로 규제를 완화하면서다. 그러나 보행자들 눈앞에 억지로 들이밀다시피 하는 현수막이 정당 활동에 도움될 리 만무하다. 플라스틱 재질이라 재활용이 어렵고 소각 시 유해물질까지 나오는 쓰레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다.
지난 5월 행안부에선 2m 이상 높이에 걸고, 15일 이내에 치우라는 등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정치 현수막 전용 게시대를 만드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관련 규정이 아니라, 현수막을 아예 없애는 것이다. ‘모두가 하니까’라는 변명 접어두고, 과감히 새로운 친환경 홍보수단을 제시할 책임감 있는 정당의 등장을 기대한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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