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함정에 빠진 대한민국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0%를 넘은 지 오래이고, 국민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 역시 200%가 넘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즉 전 국민이 1년간 버는 돈보다 빚이 더 큰 상황입니다. 부채의 질도 좋지 않습니다. 연소득의 70% 이상을 빚 갚는 데 쓰는 대출자 수가 약 300만 명에 달합니다. 취약차주(다중채무자이면서 저소득 또는 저신용 채무자)의 대출이 증가하고 부실 가능성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 참여연대는 오마이뉴스 연속기고를 통해 가계의 부채 팽창이 야기한 사회적 문제점과 개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임재만]
최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올들어 감소하던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잔액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 올해 1분기말 1017조 9천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 중 전세대출은 200조 원 가까이 증가했다. 10년 전인 2012년 말에 비해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2배 증가하는 사이 전세대출은 20배 증가해, 주담대 잔액에서 전세대출 비중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추산한 전세보증금은 2022년말 1058조 원을 넘는다. 주택도시보증의 전세보증금 보증 잔액도 올해 들어 100조 원을 돌파했다.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보증금 규모가 가처분소득 규모를 압도한다.
미국의 아티프 미안과 아미르 수피는 그들의 저서 <빚으로 지은 집>에서 집값 하락 위험이 오로지 채무자인 주택 소유주에게 전가된다고 한다. 흑자 가구는 집값이 떨어져도 손실이 적지만 적자 가구는 소비가 급격히 줄어든다. 흑자 가구의 소비는 크게 증가하지 못하나 적자 가구의 소비 위축은 전체 경제에 충격을 준다.
집값 하락이나 금리 상승, 경제 침체의 영향은 취약 계층에게 더 가혹해 불평등을 키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취약 계층의 부채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청년층·저소득층·자영업자 등 취약차주의 부채 부담을 새로운 빚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시한폭탄의 시계만 늦출 뿐이다.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가계부채 규모를 축소해 온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가계부채를 늘리고 있다. 코로나 시기 장사를 못한 자영업자에게 빚을 더 내서 버티게 했다. 시장금리가 높아지면서 올해 들어 9억 원 이하 1주택자에게 공급한 특례보금자리론이 지난 5월 말 약 25조 원에 이른다. 전세사기 등 피해자 지원 명목으로도 빚을 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주택 시장의 위기는 금리 상승, 집값과 전셋값의 하락에 따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주택 미분양, 주택담보대출 한계 차주 증가, 깡통 전세와 역전세난으로 나타나고 있다.
빚으로 역전세 해결? 더 큰 위기 부른다
정부는 지난 5일 발표한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역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총부채상환비율(DTI) 60%를 적용해 전세금 반환용 대출을 늘려주겠다고 한다. 다른 대출이 없는 경우 연소득 1억 원인 차주는 금리 4%, 만기 30년일 경우 대출한도가 3억 5천만 원가량으로 늘어난다. 역전세로 임대인이 내줘야 할 보증금 평균이 약 7천만 원 정도이니 역전세 문제를 해소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임대인이 의무적으로 보증금 반환 보증에 가입하도록 해서 후속 임차인의 전세보증금을 보호하겠다고 한다.
결국 정부는 빚과 보증으로 갭 투기 임대인을 지원하고 집값을 떠받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연 소득이 1억 원인 임대인의 임대주택 5채까지만 대출로 전세보증금 차액을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별다른 소득이 없는 수십, 수백 채를 보유한 임대사업자는 빚으로도 역전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부의 이번 대책이 역전세 상황에 처한 임차인을 지원한다는 명분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임대사업자가 보유한 주택은 대체로 빌라나 오피스텔로 깡통전세 위험이 높아서 아파트보다 역전세 문제가 더 심각하다. 깡통전세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는 보증금반환용 대출도 보증금반환보증도 불가능할 것이다.
빚으로 역전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책은 오히려 전세시장과 주택시장에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전세를 끼고 주택을 사는 것은 전세시장에서 전세주택을 공급하기도 하지만 집값이 오르길 기대한 투기다. 전세수요와 주택 투기수요가 절묘하게 만나는 것이 우리나라 주택시장의 특징이다.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투기에 실패한 것이다.
주택을 보유하는 동안에 발생할 수 있는 역전세 문제는 당연히 투기에 따르는 위험이며, 역전세 위험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도 투기 실패다. 투기에 실패하면 투기한 집을 시장에 팔아야 한다. 집을 팔아서 전세보증금을 돌려줘야 한다. 임대인이 집을 팔지 않거나 못하면 임차인이 경매를 신청해 강제로 매각하여 보증금을 돌려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결국 집을 싸게 팔아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집값도 하락하게 된다.
▲ 서울 시내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세 매물 정보가 붙어 있다. |
ⓒ 연합뉴스 |
빚으로 집값 하락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정부는 집값이 다시 상승 반전할 때까지 빚으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투기적 대책을 냈다. 소위 '시장'에 정부가 집값 상승 반전에 베팅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주고 있다. 대출규제 완화, 세금 인하, 실거주 의무 폐지,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규제 철폐 등 모든 주택정책이 다시 집값 오르기에 좋은 환경 조성에 매진하고 있다.
전세라는 특유한 제도가 있는 우리나라는 대출 규제만으로 다주택 투기를 막을 수 없다. 대출규제는 실수요만 위축시킬 뿐이다. 전세보증금은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며 LTV나 DSR 같은 규제도 없다. 대출규제로 실수요가 위축되면 전세수요가 증가하여 다주택 투기 환경이 좋아진다. 전셋값이 오르면 전세대출과 보증금반환보증으로 수요를 늘려준다. 이런 정책의 대응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전세대출과 전세금 반환보증이 전셋값을 올리게 되고, 결국 집값을 올리게 될 줄 몰랐을까? 당장 빚 내서 집 사고, 빚 내서 세 살게 해주는 정책이 인기 있고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기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전세 수요는 실수요라고 한다. 전세 수요가 있어야 다주택 투기가 가능하다. 전셋값이 오르면 갭 투기 수요가 증가해 집값도 오른다. 주거 사다리의 중간 단계로 앞으로 집을 살 것을 기대하는 전세 수요가 늘면 오히려 집값이 올라 내 집 마련은 더 어려워진다.
집값이 오르면 다주택자만 이득을 본다. 전셋값이 떨어지면 역전세로 임대인도 고통스럽겠지만 임차인의 고통이 훨씬 크다. 전셋값이 오를 때는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고통을 받고, 전셋값이 떨어지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해 고통 받는다. 집값이 떨어져 깡통 상태가 되면 보증금을 다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를 당한다. 전세의 역설이다.
역전세 문제를 빚으로 해소할 수 있게 지원하겠다는 대책은 최악의 선택이다. 주택 갭 투기는 위험한 선택이 아니라고 정부가 강변하고 있다. 부실 PF 사업장 지원, 미분양 주택 해소, 역전세 문제 해소 등 정부는 모든 주택위기 징후가 있는 곳에는 황금박쥐처럼 나타나 건설업체, 금융기관, 다주택자를 구원해주고 있다. 주택 투기에 실패한 금융기관, 건설회사, 다주택자를 이렇게 열심히 구원해주고 있으니, 부동산 불패 신화는 시장이 아니라 정부가 완성해주고 있는 셈이다.
집값과 전셋값 사이에 여유가 있는 상황의 역전세 문제는 집을 팔거나 대출을 받아서라도 해결할 수 있지만, 깡통전세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 깡통전세는 집을 팔아서도 대출을 받아서도 보증금의 완전한 반환이 불가능하다. 깡통전세 문제 중 최악의 사례는 선순위 금융기관 채권이 있고 최우선변제권이 없는 경우 세입자가 보증금을 거의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강제퇴거에 몰리는 상황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선순위 부실채권을 시장가격에 할인 매입하여 경매권을 실행하지 않고 시간을 벌어주기만 해도, 당장 해당 주택에서 강제 퇴거되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다. 경매를 진행하더라도 선순위 부실채권 매입가격만 배당을 받게 되면 임차인은 채권 액면가와 매입가의 차액만큼은 돌려받을 수 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례에서 평균 경매 낙찰가는 1억 3천만 원이며, 선순위채권액도 1억 3천만 원 정도이고, 전세보증금은 7천만 원가량이다. 선순위채권액을 30% 할인 매입하면 4천만 원가량의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다. 최우선변제금 수준의 보증금을 무이자 대출하겠다는 전세사기 특별법의 지원보다 더 좋은 방안이다. 전세대출이 있으면서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자에게는 은행이 과잉 부실 대출의 책임을 지고 적극적으로 채무조정과 무이자대출로 전환해줘야 한다.
전세 비중 줄여야
대한민국이 전세사기, 깡통전세와 역전세 문제 등 전세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전세의 수명이 다했다는 주장도 있다. 1000조 원이 넘는 전세보증금이 은행에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전세는 쉽게 없어지기 어렵다. 전셋값이 조금만 떨어져도 역전세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전세보증금이 임대인의 수중에 없는 주택 투기자금이기 때문이다.
전세비중을 줄이면서 공공임대주택을 늘리고 월세 부담을 완화하여 월세가 전세보다 나쁜 주거 대안이 되지 않도록 정책 목표를 정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전월세신고제를 확대하여 임대주택과 임대사업자 등록을 의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임대주택의 품질을 향상할 수 있고, 건전한 임대사업자도 육성할 수 있다.
임대시장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야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시장 변동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 전세임대에 대해서는 금융기관에 대한 지급준비금 규제처럼 보증금의 일정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금융기관에 의무적으로 예탁하도록 하면 역전세 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임대인이 전세만으로는 여러 채의 주택임대사업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주택임대사업에서 적정한 현금흐름이 확보돼야 세금이나 건보료 등을 내고, 주택의 정상적인 유지관리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전세보증금이 갭 투기 재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집값과 전셋값 사이의 적정한 차이가 있어야 집값이 떨어져도 깡통전세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전세가율이나 보증비율 상한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집값의 급격한 변동을 막으려면 전세시장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세대출에서도 차주의 상환능력을 살펴보고 집값과 임대인의 보증금반환능력도 심사해야 한다. 전세대출은 결국 집값과 전셋값을 담보로 한 대출이기 때문이다. 전세대출이 있는 경우 전세대출 금액은 보증을 하지 않는 것도 은행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은 오로지 임차인의 자금만 보호하면 된다. 임차인이 전세대출 이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임차인 책임이지만, 임대인의 보증금 미반환으로 전세대출 원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것은 임차인이 아닌 임대인 책임이자 은행이 져야 하는 위험이다. 보증금 미반환을 임차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은행의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이런 방식의 대출 관행은 개선돼야 한다.
[기획 - 위기의 가계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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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재만은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으로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참여연대 홈페이지(https://www.peoplepower21.org/category/economy)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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