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담한 조선 말기의 현실
[김삼웅 기자]
▲ 운현궁에 전시된 흥선대원군 영정.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다. |
ⓒ 김종성 |
김옥균이 성장하던 시기는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야심만만한 대원군은 지방유림과 토호들이 결탁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소굴 서원 철폐, 세제와 재정개혁, 국방태세 확립, 일반사회의 폐풍과 악습개량, 대전회통(大典會通) 등 법전편찬에 이르기까지 국정개혁을 서둘렀다. 하지만 켜켜히 쌓인 기득권 세력의 작풍과 폐습은 쉽게 개혁되지 않았다.
영·정조 이래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대원군 섭정기의 전주 이씨종친, 여흥민씨 등의 문벌세도가 150여 년간 정치권력을 전횡해 왔다. 이 세도정치라 이름하는 비정통권력에 의한 각급 관직의 독점과 문음제(門陰制, 공신이나 정삼품 이상의 고위층 자제의 특별채용)가 성행했고, 특히 빈번한 특별 과시(科試)는 문벌세도가의 자제에 대한 관직임명 요식절차로 전락하였고 여기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부정과 매관매직의 상습화였다. (주석 1)
조선왕조 후기에 외침과 민란이 거듭되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반강제적인 문호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민심이 크게 요동쳤다. 여전히 사회지도층에서는 위정척사론을 내세우고, 약세하지만 근대적 개화주의자들도 등장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 석파정의 내부 구한말 가장 파란만장한 일생의 주인공인 흥선대원군. 그는 운현궁과 이곳 석파정을 욺겨다니며 왕의 아버지로 사실상 정권을 좌지우지하였다. |
ⓒ 운민 |
다행인 것은 김옥균의 생부나 양부가 세도가 안동 김씨의 문중이었는데도 특정 정파에 휩쓸리지 않아서,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로 각계 인사들과 부담없이 사귈 수 있었다.
김옥균이 나이 16세가 되어 양부와 함께 다시 서울 북촌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6~7년 전의 소년이 아니었다. 그의 뛰어나게 다져진 학식이며 높은 인품이며 굳은 지조는 당시 북촌 어른들까지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곳 양반자제들은 모두 김옥균을 흠모의 정으로 대하였으며 김옥균을 동무로 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었다.
그리하여 김옥균의 주위에는 뜻있는 청년들이 집결하게 되었다. 그가 봉건적 신분제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적으로 대하는 아주 파격적인 선진적 작풍을 가진 것으로 하여 반상(班常)을 초월한 각 계층의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김홍집과 같은 근세조선의 중요한 개화파 인물도 바로 이 시기에 김옥균의 사상적 벗으로 되었다.
나라를 새롭게 혁신할 길을 모색하고 있던 김옥균의 사상생활에서 전환의 계기를 열어놓은 것은 대치(大致) 유흥기(劉鴻基) 등 개화사상가와의 상봉이었다. (주석 3)
서울 북촌(北村)은 지금의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본관 건물 주변이다. 재기발랄하고 학문적 소양이 깊은 김옥균은 여러 분야의 사람을 사귀고 그의 서실은 항상 이들로 붐볐다. 그리고 화제가 인근의 명망가 박규수에게 전해졌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1866년 7월 대동강에 침입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키고, 1869년 4월 왕의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예문관제학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곧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판서를 겸임하게 된 실력자가 되었다.
그의 사랑방에는 1853년부터 10여 차례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여 베이징을 왕래하며 서양의 각종 자료(서책)를 구해온 중인 출신 오경석(吳慶錫,1831~1879)과, 신분이 같은 역관이자 한의학자인 유대치(劉大致, 1831~?)가 드나들면서 세상의 변화를 논하였다
두 사람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치일선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오경석은 유대치와 함께 박규수를 만나 개화의 필요성을 건의하였으며, 세 사람은 만남이 거듭되면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였다.
첫 상면부터 유대치의 인품에 매료된 박규수는 그 뒤부터 두 사람을 자기 집 사랑채로 자주 불러 이들과 밀회를 거듭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의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개화가 절실하다는 인식을 함께하게 되었다. (주석 4)
지척에서 시대의 선지자들이 모인다는 사실을 영민한 김옥균이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박규수가 자신을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그가 유대치·오경석·이동인 등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을 것이다.
주석
1> 김용욱, <갑오개혁의 정치사적 조명>, 김영작 외, <한국근대정치사의 조명>, 73쪽, 재인용, 집문당, 1995.
2> 정영희, 앞의 책, 3~4쪽.
3> 김석형, 앞의 책, 17쪽.
4> 안승일,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19쪽, 연암선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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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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