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정상회담 노림수 '미군철수'…박정희는 그걸 알고 거부했다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이유가 궁극적으로 ‘주한미군 철수’에 있었다는 점이 1972년 7ㆍ4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전후해 진행됐던 남북 당국자 간 대화를 통해 재확인됐다.
6일 통일부가 공개한 1971년 11월~1979년 2월까지의 남북회담문서(1678쪽 분량)에 따르면 북한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남북 정상회담과 함께 주한미군의 철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1972년 5월 2~3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대북 밀사’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동생이자 당시 북한의 2인자였던 김영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다. 5일엔 김일성과도 만났다. 한국 전쟁 이후 남북 당국 간 첫 고위급 회담이었다.
김영주는 회담에서 “통일 문제는 우리 급에서 되지 않는다”며 “총비동지(김일성)와 박 대통령 간 정치협상을 한다면 긴장 완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3개월 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과 회담한 사실을 언급하며 “닉슨이 중공(중국)을 방문해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우리도) 수뇌자 회담을 해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다.
정상이 만나 통일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이른바 톱다운(top-downㆍ하향식) 방식의 제안이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 시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섰다가 결국 실패로 귀결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과 동일한 방식의 접근법이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회담에 참석했던 이후락은 “처음부터 김 수상(김일성)과 박 대통령이 회담을 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며 “단계적인 방법을 착안했다”고 맞섰다. 정상회담 전 낮은 급부터 신뢰를 쌓고 이를 통한 인적ㆍ물적ㆍ통신 교류 등이 전제돼야 한다는 보텀업(bottom-upㆍ상향식) 방식의 역제안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정상회담 제안을 거부한 배경은 북한의 의도가 실제로는 회담 자체가 아닌 회담을 대가로 한 주한미군 철수에 있었음을 간파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이날 공개된 사료에서 김영주는 “이남에서는 제국주의(미국) 군대가 철수하겠다는데 대해 남쪽이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며 노골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이후로도 북한은 내내 “외세를 배제해야 한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면서 회담은 매번 교착상태에 빠졌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1960~1975년)의 장기화로 인해 미국에 불리한 전황(戰況)이 전개되던 때다.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군을 아시아에서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미 7사단을 철수시키기도 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는 한반도에서 ‘제2의 베트남전’을 벌일 빌미가 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이후락의 방북에 이은 1972년 5월 29일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답방 때도 정상회담 요구를 거절하고, 평양과 서울을 오간 고위급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7ㆍ4 남북공동성명을 체결하는 일종의 우회로를 택했다.
이러한 결정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김종필 당시 총리였다. 김 전 총리는 공동성명 발표 직후 국회에서 “이 몇 장의 성명에 우리의 운명을 점칠 수 없으며 또 (북한을)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북한은 당시 회담에서 김 전 총리의 발언을 직접 언급하며 “김종필 총리가 공동성명을 무력화하는 쪽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비난을 이어갔던 것으로 확인된다.
김 전 총리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에서 “북한이 대화를 하겠다고 하니까 국가보안법을 없애야겠다”는 이후락 부장의 제안에 대해 “터무니없는 소리 마시오. 당신이 북에 또 갈 일은 없을 거요”라고 일축했다는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는 여기에 더해 7ㆍ4 공동성명 체결 이듬해인 1973년엔 6ㆍ23 선언을 발표하고 “남북한이 독자 유엔 가입을 추진하고, 한국은 북한의 유엔 기구 가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북한의 의도와 반대로 한반도 상황을 국제 무대로 옮기기 위한 의도였다.
실제 이날 공개된 문서엔 북한이 6ㆍ23 선언에 대해 “가장 노골적인 민족 분열적 책동”이라고 맹비난했던 대목이 확인된다. 결국 북한은 그해 8월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깡패들과 마주 앉아 국가 대사를 논의할 수 없다”며 ‘김대중 사건’을 핑계로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공개된 문서엔 1974년 광복절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에 대한 북한의 반응도 담겨 있다. 당시 정부는 대통령을 저격하려던 문세광이 북측 지령을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며 북측을 강하게 성토했다. 이에 대해 북측 류장식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은 “그따위 날조를 어디다 함부로 해”라고 언성을 높이며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공동성명 이후 이어졌던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는 1975년 3월 10차를 끝으로 더는 열리지 않았다.
이번 문서 공개는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공개한 남북 대화 사료집(제2∼6권)에 이은 세 번째 공개다. 통일부는 이날 7ㆍ4 남북공동성명 발표 전 비밀접촉(11회), 공동성명 발표 이후 이어진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3회), 남북조절위원회 회의(3회),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10회)의 진행 과정과 회의록 등을 공개했다.
평양에서 이뤄진 이후락ㆍ김일성의 면담과, 서울에서의 박정희ㆍ박성철의 면담 기록은 공개 대상에서 제외됐다.
다만 공개된 사료엔 “1ㆍ21 사태에 대해 1972년 평양에서 이후락 씨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 자신이 자기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시인, 정중히 사과한 일이 있음에도”라는 대화록이 포함돼 있다. 김일성이 이후락에게 1968년 김신조 일당을 보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접 사과했다는 의미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은 정상회담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연출해 한ㆍ미 동맹의 틈을 벌리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군사적 야욕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북한을 신뢰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리했던 국제 정세 속에서 7ㆍ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시간을 버는 동시에 핵무기를 비롯한 자체 국방력을 강화하는 방식을 택해 대응했다"고 말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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