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난 사람]"기도하는 마음과 글 쓰는 힘…제가 가진 것 모두 드릴게요"
가난·공생·기쁨·위로·감사·사랑 등 화두
삶 정리하는 마음 책에 담아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기도하는 마음과 글 쓰는 힘밖에 없으니, 다 드렸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산문집 ‘인생의 열 가지 생각(마음산책)’을 펴낸 이해인 수녀의 소회다. 1945년 광복의 기쁨 속에 태어나 1964년 수녀원에 입회해 수도자의 삶을 걸어온 지 어느덧 60여년. 삶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그간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난, 공생, 기쁨, 위로, 감사, 사랑, 용서, 희망, 추억, 죽음 등의 화두를 책에 담았다.
책과 편지, 자료들을 살피는 데 시간을 쓰고 있다는 이해인 수녀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기록물은 179권에 달한다. 그 속에 스민 ‘그날 하루 꽃이 되고 별이 된 사연’을 들춰내며 느낀 회포도 일부 책에 담았다. 수도자의 삶을 살아온 그에게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일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다. 가늠되는 건 "나쁜 일도 그렇지만 좋은 일 역시 사람의 힘만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뿐.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위로를 꽃피우며 살아왔다. 그는 모든 것이 ‘은총’이라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끊임없이 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라고 고백한다.
죽음조차 기쁨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이해인 수녀의 ‘열 가지 생각’을 서면으로 만났다.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나.
▲13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하는 광안리 수녀원 본원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일하는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원내의 ‘해인글방’을 작업실 삼아 출퇴근하며 글을 쓰고 산책도 하며 종종 방문객들도 맞이하는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읽으려고 쌓아둔 책들이 너무 많은데 젊은 날과 달리 진도가 안 나가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내 모습에서 쓸쓸한 노년을 느끼기도 한다.
-60여년 전 수녀가 될 당시 "문학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후 문학 달란트를 활용해 많은 이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그 내용은 수십 권의 책을 이뤘다. 책마다 각기 다른 목적과 출간 배경이 있었을 텐데 이번 산문집은 "삶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어린 시절을 한국전쟁 직후에 겪어서 그런지 삶의 밝은 쪽보다 슬픔과 비극을 보고 비애를 많이 느낀 것 같다. 삶의 유한성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묵상을 자주 하며 살았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현재 시점에서 죽음이란 단어가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게 실감 난다. 거의 매일 공동체 안팎에서 부고를 보고 들으니 내 삶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더라.
-문학적 달란트를 빨리 발견해 좋은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고, 많은 독자에게 위로와 감동, 공감을 전했다. ‘펜을 든 수도자 삶’의 소회가 궁금하다.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하고 47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러 책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아 기쁜 마음이다. 1980년대 초반 책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면서 받은 언론의 조명과 불법 출판물이나 음반이 제작되는 등의 일들은 수도자로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종교를 초월해 많은 독자가 생기고 시를 통해 선한 기운과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감사하다.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지만 제가 쓴 시들이 민들레 솜털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좋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번 서울국제도서전 사인회와 특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감지할 수 있었다.
-책에 무소유에 관한 강박이 오히려 자신을 우상화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종교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난’하게 사는 게 정답은 아닌 듯하다. 건강한 의미에서 ‘청빈’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수도자로서 청빈이란 누구에게도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의 자유다. 물질이나 명예나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는 사랑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책에 법정스님과 관련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종교는 달랐지만 많은 부분에서 통했던 것 같다.
▲스님과의 우정을 꽤 오래 지속했다. 자주 만나 뵙진 못했어도 종교의 다름과 관계없이 서로 뜻이 잘 통했던 것 같다. ‘수녀님, 어린 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지금도 스님이 주셨던 편지의 첫 구절을 가끔 생각한다.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주로 자연, 책, 음악 등을 이야기했다. 종종 개인적 고민이 생기면 상담도 청했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지금은 그분의 맏상좌였던 덕조스님이나 조카인 현장스님과 종종 교류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비범한 희망을 얻는 일"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평범한 일상’은 무엇이며 그에 따른 ‘비범한 희망’은 무엇인가.
▲평범한 일상이란 매일 밥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산책하고 수업하는 모든 행동을 말한다. 비범한 희망이란 그날이 그날 같은 뻔하고 지루할 수 있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들을 사랑으로 물들여 새 시간이 되도록 반짝반짝 빛내는 것이다. 여기에 힘든 일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희망이 숨어있다고 본다.
-항상 우리 사회에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시선이 향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
▲요즘 마음 쓰이는 일은 청소년과 노인들에게서 늘어나는 우울증과 자살 같은 것들이다. 마음의 병을 얻어 투병하는 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에게 큰 연민을 느낀다.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이 많은 편인가.
▲수도자이다 보니 사람들이 힘든 이야기를 쉽게 나누며 위로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고 있다. 한번은 낙태를 결심하고 병원에 갔다가 마음을 바꾼 어느 미혼모가 제게 아기를 안고 와 입양을 부탁해서 연결해 준 기억이 있다, 자살한 딸의 노트를 저랑 함께 읽고 싶다는 엄마를 만나 위로하고 같이 수목장한 절에 가서 기도해주기도 했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을 허락한다지만,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너무 많다. 일례로 ‘치매’의 경우 본인과 주변인의 고통이 너무 커 간병하는 자녀에 의해 가족이 극단적 결말을 맞기도 한다.
▲속 시원한 답을 내놓기 어려운 문제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인간임에도 역경을 역이용해 축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책을 보면 늘 ‘메멘토 모리’를 떠올리며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특별히 준비하는 내용이 있는지, 죽음 뒤에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는지.
▲1975년 10월10일 이어령 교수님이 루이제 린저 작가와 우리 수녀원을 방문한 날, 방명록에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란 글자를 적으신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타계하신 뒤 (방명록 글자를) 시 엽서에 넣어 영인문학관에 보냈다. 그 말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신과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다 떠난 행복한 순례자이자, 한 편의 시, 러브레터와 같은 존재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근래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이고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그간 모은 일기, 사진, 편지들을 정리하고 있다. 조만간 생전에 남긴 작품 저작권을 수도공동체에 전적으로 일임한다는 공증(이미 두 차례 진행한 바 있음)과 유언장을 작성할 예정이다.
-오늘을 살아내는 독자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
▲‘채우고 싶은 것들’이란 제 짧은 시를 전하고 싶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생각이 남아요 /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사랑이 남아요 / 글을 쓰고 또 써도 글이 남아요 / 나머지는 모두 하늘나라에 가서 채우면 됩니다."
이해인 수녀 수녀이자 시인.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1964년 수녀 원(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 1976년 종신서원을 한 후 오늘까지 부산에서 살고 있다. 필리핀 성 루이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제9회 새싹문학상, 제2회 여성동아대상, 제6회 부산여성문학상, 제5회 천상병시문학상, 제26회 한국가톨릭문학상 본상 등을 수상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 이후 지금까지 30여종에 가까운 저술 활동을 펼쳤다.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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