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카지노에 간 택배 노동자는 어떻게 됐을까
[조영준 기자]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위험사회>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처음에는 좋았다. 무엇으로 인해 돈을 벌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말해줄 수 없지만 그래도 좋았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청혼도 하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웃음을 안겨줄 선물도 준비할 수 있게 되고. 내년에 입주할 아파트에 잔여금까지 모두 내고 나면 앞으로 남는 건 행복 밖에 없을 줄만 알았다. 모두가 핑크빛 미래만 생각할 수 있으니 자신만 더 열심히 하면, 아니 어제처럼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영길(박우건 분)의 이야기다. 작은 트럭을 몰고 택배 일을 하며 하루하루 일당을 버는 그에게 전에 없던 큰돈이 생긴 것은 강원도에 가게 되면서부터였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국내 최초의 내국인 출입 가능 카지노에 영길도 우연히 발을 들였다. 확실히 초심자의 운이라는 게 있었던 모양. 하필이면 돈을 따게 된 그는 오늘 행복했던 순간을 내일도 그려내고 말겠다는 다짐 하나로 또 한 번 강원도로 향한다. 그 걸음이 자신의 미래를 모두 짓밟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로.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위험사회>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하루를 영길에게 선사한 영화가 이제 할 일은 끝없는 내리막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이 공간에 저당 잡힌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평범한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잠시 감춰뒀던 본심을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처음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트럭을 전당포 주인 정섭(황상경 분)에게 저당 잡히는 일이다. 카지노보다 더 무서운 곳이 전당포라는 말이 있다. 카지노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꿈을 꾸게 만드는 공간이라면 전당포는 그 꿈으로부터 깨어날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트럭을 맡기는 순간, 영길의 발은 그곳에 깊이 묻힌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정섭의 전당포에 벌써 제 삶을 저당 잡힌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서울대를 나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진수(장준휘 분)다. 그는 카지노로 향하며 오천만 원을 빌렸고, 이자를 포함해 갚아야 할 빚은 4억이 넘은 상태다. 도망을 다니다 결국 붙잡혀 와서도 다시 천만 원만 더 빌려주면 꼭 성공해서 빚을 청산하겠다는 말을 한다. 이번에도 갚지 못하면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딸을 넘겨야 한다는 무서운 계약 조건 앞에서 망설일 정도다.
이 작품에는 영길과 진수 두 사람 외에도 도박에 중독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가져온 돈을 모두 잃고 기차역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돌아갈 돈마저 모두 탕진해서 카지노의 문조차 떠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역무원에게 차비를 빌려달라는 말을 했으면, 돈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는 내부지침이 정해졌을 정도다. 그럼에도 영화가 정섭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영길과 진수 두 사람을 연결시켜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다른 처지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같은 모습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중독된 삶'의 모양을 그려내기 위해서다(물론 중후반부를 지나며 두 사람이 만나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함도 있다). 일당을 벌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도, 학교 선생님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도박의 중독 앞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03.
두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영길과 진수에게 굳이 하나의 차이를 찾자면 한 사람은 이미 중독이 되어버린 결과에 해당하고, 또 한 사람은 중독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 놓여있는 사람은 영길이다. 진수를 포함에 수많은 사람들이 카지노의 불빛에 이끌려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그 위험한 길을 영길 역시 따라 걷는다. 앞서 영화가 영길에게 감춰뒀던 위험을 하나씩 꺼낸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 반대의 쪽에서 그가 벗어날 수 있는 장치도 여럿 마련해 둔다. 영길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영길은 운이 좋았던 편에 속한다. 저당 잡힌 트럭을 다시 되찾을 비용을 여자친구 하림(신우희 분)의 엄마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빌려주기도 하고, 그 돈마저 잃고 차비도 없이 겨울산을 떠돌던 그를 마을 노인 철산(안석환 분)이 도와주기도 한다.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그에게 주어졌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유혹의 늪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지 못한다. 기회와 친절로부터 눈을 감고, 위기와 불행을 향해 기어가는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삶이라는 것이 의외로 공평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을 이미 한 진수와 이제 그 선택을 하고자 하는 영길이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며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도려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미 커져버린 두 사람의 종양은 이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으로만 고통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회복이나 호전, 완전한 제거가 아닌 경감. 떼어내고 돌아갈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돈에 의해서다. 두 사람을 포함한 카지노를 향했던 모두가 처음에 원했던 것도 돈. 이제 세상의 끝에서 한 사람을 살해하고, 또 한 사람의 돈을 훔쳐 달아나고자 하는 이유도 돈.
▲ 제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위험사회> |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일련의 과정 이후 영길이 다시 돌아온 서울은 이제 그가 기억하던 서울과는 다른 도시다. 과거를 잊고 다시 나아가고자 하지만, 이제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아무도 없다.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운전을 대신하고, 술에 취한 사람들의 밤을 대신 밝히고.
지난날의 과오를 깨끗이 씻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새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영길을 영화는 다시 한번 유혹한다. 그의 강인한 각오를 무너뜨리기 위한 조금 더 잔혹한 미끼로. 꿈을 꾸며 향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무너진 꿈을 주워 안고 룰렛의 테이블 위로 향하도록.
"룰렛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면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게 그렇게 영원히 반복되는 거예요."
영길이 진수를 만나 마주 앉았던 장면에서 했던 말이 있다.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제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제가 하루에 12시간 배달 일을 하면 8만 원을 벌거든요? 그럼 욕심 안 부리고 딱 10만 원만 따면 되는 거잖아요.' 그는 모든 것을 잃기 직전이었던 그때도 카지노로 향했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몸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독은 빠르게 다시 퍼지기 시작한다.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차 안 라디오에서 마을 노인 철산의 손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제 세계적인 연주가가 되었다고 한다.
위험사회는 어디에 있나. 작은 시골 마을에는 품 속의 꿈을 이루는 아이가 있고, 가까운 카지노 테이블 위에는 허공의 꿈을 휘젓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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